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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돌씨 Aug 31. 2022

그림만 배워서 모를 거라고요?

: 전문성이 떨어질 것이라는 지적에 대한 변론


 "지원자 분의 전문성에 대해 문제가 제기된다면 뭐라고 반박하실 건가요?"


 지금으로부터 오래되지 않은 면접시험에서 면접관으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약 6개월 정도 근무가 예정된 기간제 학예연구원을 뽑는 시험이었고, 그 기관은 개관을 준비 중인, 한 마디로 말하면 경력 인정이 되지 않는 신생 기관이었다. 당시 유관기관 경력을 3년 정도 가지고 있던 나는 전공보다는 경력에 치중한 어필을 했기에 그 질문을 듣자마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처럼 전공에 대한 질문은 나처럼 비주류의 학문을 전공한 이들에게 굉장히 많은 고민을 안겨준다.


전문성에 대한 의구심을 보인 면접관을 만났던 기관은 엄밀히 말하자면 '미술사'라는 내 전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성격의 곳이었다. 억울하게나마 변명해보자면 하지만 내가 과거에 일했던 박물관 역시 내 전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곳이었다. 전공만을 고려해서 지원한다면 나는 박물관보다는 미술관을 택했어야 하고, 거기서 세부 전공까지 따지자면 사실상 내가 전공에 맞춰서 일할 수 있는 기관은 대한민국에 없다고 봐야 한다.


 

미술사를 전공하면 그림만 배울 테니 한자나 역사적 배경지식 같은 것들이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건 크나큰 착각이다.


문득 교수님으로부터 들었던 "미술사는 인문학의 꽃"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미술사학은 단순히 그림만을 배우는 학문이 아니다. 당시의 정치상황, 사회상, 시대정신, 문화적 경향 등 다각적인 면에서 분석하고 그것이 미술작품이라는 매개체에 어떻게 투영되었는가를 다루는 학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배경지식이나 화가의 일대기를 익히는 것은 필수적이고, 그 외에도 작품 분석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는 모든 근거를 찾아야 하기에 당대의 문학작품이나 사료를 찾는 과정이 주가 된다.


만약 동양미술 전공자라면 자료를 찾기 위해서 한자를 공부하고, 추가적으로 일본어나 중국어를 공부하는 경우도 많다. 단순히 시각적으로 보이는 기법이나 형식에 대한 담론만을 다루는 것은 1차원적인 분석에 지나지 않는다. 미술사는 거기서 한 층 더 깊이 들어가서 이면에 감춰진 이야기를 끌어내는 데에 의의를 가진다. 그런 노력을 해 온 사람들에게 "전문성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박물관에서 일하는 이들 중에는 대체로 사학과 전공자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의외로 사학과가 아닌 전공자들이 많다. 내가 과거에 일했던 기관은 미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종합박물관이었지만 연구원 중 반 이상이 미술사학 전공자였고, 사학과 전공은 전체 연구원 중 10~15퍼센트, 그 외에는 박물관학, 사진학, 민속학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업무를 진행하기 힘들 정도로 전문지식이 부족하다고 생각은 해 본 적도 없고, 상사로부터 그런 지적 또한 받아본 적이 없다.



 최근에는 항공이나 기상, 해양 등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박물관들이 많이 세워지고 있기 때문에 해당 학문을 전공한 인력을 더 우대한다는 것은 납득 가능한 일이다. 그럼 기관 내 모든 연구 인력이 같은 학문을 전공한 것이 과연 기관의 입장에서 좋은 것일까?


내가 받았던 질문이 그런 의도로 물어본 질문이었다면 굉장히 실망스럽다.


어떤 박물관에서 한국전쟁 시기에 발표된 한국문학에 대한 전시를 한다고 가정해보자. 사학과 전공자들은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초점을 맞출 것이고, 국문학 전공자들은 전시(戰時) 문학이 가진 문학적 특성에 대해 말할 것이다. 이때 미술사학 전공자는 어떤 의견을 제시할 수 있을까?


한국전쟁기에 제작되었거나 이를 주제로 한 미술작품으로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김환기의 <피난열차>, 박수근의 <나목> 같은 것들이 있다. 무대를 좀 더 확장시키면 당시 중국에서는 한국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을 돕는다는 의미) 전쟁'이라고 부르면서 종군화가를 파견하기도 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많은 수의 한국 화가들은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현대문학'같은 잡지나 한국문학작품의 삽화를 그리는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경험에 비추어보면 이런 사소한 양념 같은 이야기들은 꽤 높은 확률로 관람객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결과적으로 미술사는 이런 이야기들로 하여금 시야를 확장시키고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드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얼마 전 어느 미술사학 교수님과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교수님으로부터 "요즘같이 융복합이 각광받는 시대에 이 학문은, 이 업계는 시류를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집중해서 깊게 파는 태도는 연구자에게 필요한 덕목일지 모르지만 사회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데에는 넓게 보는 안목 또한 필요하다. 대학이 장서서 인문학을 사장시키는 지금의 시대에 아직까지도 좁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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