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학력 저임금 대표직종, 그래도 되고 싶다면.
'나이 스물 일곱에 석사학위 소지자, 아르바이트를 제외한 관련 업무 경력은 없음.'
이것이 대학원을 졸업할 당시 나의 스펙이었다. 어학자격증이 2개, 한국사 자격증이 1개 있었지만 한국사는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지원자가 많았고, 어학능력은 업무에 유용하게 쓰일 만한 수준의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심경으로 구직활동을 시작했다.
보통 학예업무에 종사하길 희망하는 사람들은 갤러리와 박물관, 미술관에서 첫 커리어를 쌓는다.
이 업계는 '고학력 저임금'이라는 인식이 만연해 있었기에 아무리 석사학위자라 해도 기간제 연구원으로 입사하면 첫 월급의 실수령액은 180만원선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근무하는 곳이 국립이든, 공립이든, 사립이든 대체로 비슷하다. 심지어는 이것이 평균이고 이보다도 적은 액수를 주는 곳도 있다. 2022년 현재까지도.
이 업계의 전형적인 커리어테크를 잠깐 설명하자면,
보통 관련 전공(사학, 미술사학, 박물관학 등)의 학사 내지는 석사 학위를 가지고 졸업한 후, 국공립이나 사립 박물관 및 미술관에서 기간제 연구원으로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 졸업 후에 대학원 진학을 보류하고 갤러리나 경매회사에 입사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학예사라고 인정받는 정3급 학예사 자격증을 발급받기 위해서는 1. 석사학위 소지자로, 문체부에서 인정한 경력인정기관에서 관련업무 경력이 2년 이상 이거나, 2. 준학예사 자격증 소지자로 경력인정기관에서 관련업무 경력이 4년 이상 이어야 하므로 학예사를 목표로 하는 사람들은 대개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기간제 연구원으로 일하는 것으로 커리어를 시작한다.
기간제 연구원은 보통 10개월 계약직이 가장 많고, 프로젝트 하나를 진행할 3~6개월짜리 연구원을 구하는 곳도 있기 때문에 보통 한 곳에서 2년을 다 채우기는 힘들다. 보통은 한 곳에서 계약을 연장시켜 20여 개월을 채우고 다른 곳에서 나머지 개월 수를 채워서 자격증을 받는다.
그럼 여기서 의아한 부분이 몇 가지 있을 것이다.
첫 번째, 한 곳에서 왜 2년을 못 채우느냐?
현행법 상 24개월 이상 계속근로를 하면 무기계약직으로 전환이 되므로 기관은 최대 23개월 이상의 계약 연장을 하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 1년은 12개월인데 왜 10개월짜리 근무를 하는가?
국가 및 지자체 행정기관의 채용 절차는 보통 1~2달 정도 소요된다. 그러니 근무를 아무리 이르게 시작해도 2월에서 3월이 된다. 그리고 계속근로기간이 12개월을 넘기면 퇴직금을 지급해야 하니 기관 입장에서는 계약직 1명에게 돈이 더 들어가게 되는 셈이다. (이 때문에 계약 만료가 다가온 근로자에게 한 달정도 쉬었다가 채용공고를 올리면 다시 응시하라고 한 박물관도 있었다-_-)
아무튼 이런 고용불안을 계속 느끼면서 기간제 연구원으로 근무하는 동안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 지차체에서 주관하는 지방직 학예연구사 시험이나 국가직 학예연구사 시험, 또는 임기제 공무원을 통해 학예연구사가 되는 방법이 있다. 이것이 기간제에서 정규직으로 올라가기 위한 전형적인 루트이다.
이 외에는 사립박물관이나 미술관에 학예사(또는 큐레이터라고도 함)로 취직하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정3급 학예사 자격증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기간제 연구원으로 2년 이상을 근무하고, 자격증을 받은 뒤 입사 준비를 한다.
기간제 연구원과 공무원 외에는 '공무직'이라고 불리는 무기계약직 자리도 있다.
간단히 말하면 '공무원의 정년보장을 해주는 대신 연봉은 동결, 업무는 기간제 연구원과 유사한 업무 보조'인 자리이다. 이 경우에는 고용불안은 해결되지만 나이 60이 넘어서까지 (어쩌면 자기보다 어린)학예사의 업무 보조를 해야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보통은 공무직으로 들어가서 2년을 채워서 자격증을 발급받고 근무를 계속하면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대학원을 졸업할 즈음 기간제 연구원 채용공고에는 "관련 전공 학사 졸업 이상"이라고 되어 있었지만 이미 관련 전공의 석사학위를 가진 지원자들이 엄청 많았기 때문에 석사 학위는 취업시장에서 '기본값'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니 대학교 졸업자는 더욱 취업문을 두드리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면 무엇으로 변별력을 가르느냐? 경력이다.
지원자들의 학력이 비슷하면 관련 경력이 있는 사람이 서류전형에서 더 높은 점수를 얻는다.
졸업 후 처음 구직 준비를 했을 때 경력이 전무했던 나는 이 부분에서 굉장히 고배를 많이 마셨다.
'신입 뽑는 자리에 경력이라니..!'하고 억울해하면서 불합격 통보 앞에서 좌절한 것이 어림잡아 수십번이었다.
업계 불문 경력직 신입을 선호한다는 말을 절감한 순간들이었다.
결국 나는 경력인정기관에는 입사하지 못하고 경력인정은 되지 않는 어느 유관기관에 입사해서 1년의 경력을 쌓은 다음에야 경력인정기관의 기간제 연구원으로 입사할 수 있었다. 화려하게만 보였던 학예사로서의 길을 시작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고, 구직을 준비하는 동안 불합리한 상황들을 직간접적으로 목격하면서 환멸을 느끼기도 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공부한 것이 아까우니까 뭐라도 해야겠다'라고 생각했던 오기에 가까웠던 태도는 입사 후 때로는 열정으로, 때로는 체념과 회의 등의 부정적인 감정들과 싸우는 순간들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여전히 이 길에 서 있는 걸까?
요즘도 손에 잡고 있는 줄을 놓치면 낭떠러지 아래로 영영 추락할 것만 같은 불안감이 종종 엄습한다.
퇴사를 앞두고 보니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것말고는 길이 보이지 않으니까'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