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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들과 바람 Apr 17. 2019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아, 누가 있어 내가 하는 말을 듣고 기억하여 주었으면! 누가 있어 내가 하는 말을 비망록에 기록하여 
주었으면! 누가 있어 내가 한 말이 영원히 남도록 바위에 글을 새겨 주었으면!"
( <욥기>, 19장 23~24절 )



  예술의 창작의 근인(根因)을 한 시구를 빌려 설명한다면 그것은 "지속에 대한 다부진 욕망"일 것이다. 물론 그것이 모든 예술 탄생 과정의 가장 깊은 곳에 놓여 있는 핵이라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럼에도 시대가 변함에도 지지 않는 생명력은 분명 예술가가 꿈꾸는 것이다.


   작품이 영속함은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시간을 비껴감을, 시간을 이겨냄을 의미한다. 더 구체적으로 시간을 이겨낸다는 것은 작품을 부단히 깨뜨리고 다시 정합하는 일을 반복하는 각기 다른 시대의 수많은 개별 감상자들에게 작품이 계속 이어진다는 것이다. 시간이 작품을 검증한다는 건 이런 과정을 통해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검증자로서의 시간을 신뢰할 수 있을까? 그저 무심히만 흘러가는 것 같은데, 시간은 정말 면밀히 작품과 마주하고 대화하고 있는 것일까? 작품이 정말 긴 시간 동안 무수한 환경과 무수한 주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거치면서도 잊히지 않았음에는 필히 그 안에 내적인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찬란했던 옛 영광과 성벽들도, 더할 수 없이 강력했던 권력들도 시간 앞에서는 끝내 예외 없이 흩어져 왔다. 그 압도적인 풍화를 견뎌내는 것은 필히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힘을 요한다. 그 내적인 힘이란 옛 유산으로부터 이어지면서도 훗날들에 대하여는 바래지 않는 예술로서의 구성적 아름다움과 그 셀 수 없는 사람들의 깊은 중심을 관통한 어떤 보편성일 것이다.


   한편, 이러한 생각이 지나치게 작품 자체만을 바라보는 작가주의적 관점에 치우친 것 아니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작품이 시간을 견뎠음에는 작품의 내적인 힘만 중요했을 뿐, 거기에는 그럼 작품 향유자들의 역할은 부재한 것인가 물을 수 있겠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 나누었듯 시간이라는 하나의 큰 흐름 속에서 작품과 직접 맞닿는 원자적 주체들은 감상자 개개인이다. 작품과 공명해 줄 이들이 없다면 예술의 힘, 나아가 예술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된다. 그리고, 많은 경우 작품의 진정 깊은 곳에 침잠해 있는 가치들은 창작자 본인보다 향유자들의 집단 기억으로 건져 올려짐을 우리는 자주 보아왔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진실이라면 작품에 대한 마지막 단언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예술은 그것이 놓인 시대에 따라 항상 새로운 모습과 의미로 읽혀왔다. 사실 이전 시대의 것들은 대개 대부분 잊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을 뛰어넘어 어느 작품이 변화들과 꾸준히 호흡하고 다하지 않는 활력을 보여주며 다가올 것들마저 예비할 때, 우리에게 그것은 온전하고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무엇이 될 것이다.


   검증자로서의 시간에 건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여과한 뒤 빠드림 없이 건져주는 마법의 그물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물 속에 잘못된 방향으로 놓이게 되어 스르륵 빠져버린 더없이 소중한 작품과 예술가들이 분명 없지 않을 것이다. 설령 그물에 남았다 하더라도 너무 늦게만 건져 올려져 눈물로 얼룩진 삶의 날들을 보낸 이들도 많다. 그럼에도 그들이 창조의 바로 그 순간에 느꼈을 어떤 높은 감정을 위로로 삼지 않았을까 떠올려 보는 건, 다시 생각해도 우리 자신만을 위한 위로일까.



[ 이미지 : 김환기, <영원의 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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