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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들과 바람 Jun 05. 2019

사회는 실재한다

갈릴레이의 말을 빌리며

   주변에 기업 혹은 비즈니스 영역에서 일을 하고 계신 분들과 교류할 기회가 많이 없었습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그와는 다른 영역에 몸 담으신 터이기도 했고 또 (다시 바로 그 이유에서인지) 저 자신도 그쪽에 커다란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수년 전 국내에서 손에 꼽히는 기업인 분과 교류할 기회를 우연히 얻게 되었는데 나는 완전히 다른 문화권의 사람을 만난 것처럼 다른 공기와 에너지를 감각할 수 있었습니다. 또 누구보다 커다란 열정과 정직을 가지고 계셨기에 기업인에 대해 막연히 품고 있던 몇몇 선입견들도 떨칠 수 있었습니다. 이전보다 강화된 선입견도 없진 않았습니다만.


   한 번은 그분 내외를 동반해 여러 지인들과 식사 자리를 가졌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부인께서 "우리도 미생이지요"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많은 겸손이 담긴, 아주 진지하게 뱉은 말씀은 아니었지만 제게는 그래도 하나의 충격처럼 남았습니다. 미생이라는 단어가 사회 내 어떤 수직적 계층의 존재가 전제된 것이라면 당연히 그분들은 사다리 가장 꼭대기에 있어야 할 분들이었습니다. 그래야만 미생이라는 단어가, 계층이라는 개념이, 사다리라는 생각이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적어도 어떤 면에서는 그들도 스스로를 미생이라 칭할 만한 부분이 조금이나마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사회 구조의 어떤 아이러니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의 기억은 이제는 사회과학에서 다소 낡은 화두가 되어버린 사회실재론의 잔상들을 되살려주었습니다. 사회실재론에 따르면 사회란 단순히 개인들을 모두 합한 것 이상의 무엇이며 그것은 독립적인 실체입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특성으로부터 파생하여 사회실재론은 또 여러 가지 세부적이고 복잡하며 다소 정치적인 내용들을 갖지만, 내가 알고 있고 또 흥미롭게 여기는 부분들은 정확히 위의 내용들까지입니다. 사회란 그것을 구성하는 원자적 개인들의 낱낱의 합 너머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 말입니다.


   위의 내용을 도식적으로 단순화하여 "1+1+1 = 4 or 2"와 같이 한번 정리해봅니다. 좌변의 1이 개인, 개인의 행위, 개인의 의도를 나타낸다면 우변은 그것들이 상호작용하여 최종적으로 이 사회에 나타난 결과 내지는 양상을 의미합니다. 3이라는 단순한 개인합에서 1을 더하거나 뺀 것이 어떤 구체적 실체로서의 사회의 작용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마치 사다리의 꼭대기에 있건 가장 낮은 곳에 있건, 그 위에서 개별자들이 어떤 몸부림을 치는지와 상관없이 이 시스템이 그 위의 구성원 전체를 미생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편 간혹 "1+1+1 = 3"으로 보인다 해도 - 다시 말해 어떤 현상에 사회가 개입한 부분이 없어 보인다 해도 - 애초에 각 개인이 "1"이 되도록 한 데에는 보이지 않게 힘을 행사한 사회의 그림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회의 구조 및 문화가 개인의 의식 및 자유를 제한하고 구속할 수 있다는 것인데,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이라는 학자는 이러한 외부적 압박을 '사회적 사실'이라는 단어로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조금 거칠게 일반화한다면 모든 사회과학자들은 적어도 이러한 점에서 사회의 실체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물론 명시적으로 자신의 사상적 내지는 방법론적 스탠스는 사회 실재론의 그것과는 다르다 말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들 역시도 단순히 원자적 주체들만 분석해서는 총체적인 이해와 문제의 해결을 도모할 수 없다는 데 결국 동의할 것만 같습니다. 이를테면 개별 경제적 주체들의 선택을 분석하는 데에 집중하는 경제학자들 (이러한 접근을 microfoundations이라고 하지요) 역시 똑같이 이기적인 선택을 하는 각 주체들의 선택이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최선의 결과가 나올 수도, 최악의 결과가 나올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듯 말입니다.


   사족으로, 이와 같은 '사회과학적' 마음가짐은 우리의 삶에도 꽤나 유용할 것 같다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덧붙여봅니다. 무엇인가를 접했을 때 그저 거기에 얽힌 사람들과 행위들 자체만을 그대로 놓고 판단하기보다는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하도록 환경적으로 독려되었는지, 그 일이 왜 그렇게 밖에 흘러갈 경향이 짙었는 지를 한 걸음 물러나서 조용히 관찰해보는 일은 우리에게 넓은 시야와 합리적인 융통성, 그리고 풍요로운 상상력을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 이미지 출처 : Hieronymus Bosch, <The Garden of Earthly Delights>, 1490 - 15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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