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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랫화잍 Jan 31. 2024

길들지 않은 불행은 누구의 책임인가.

<다섯째 아이> 도리스 레싱, 민음사

『다섯째 아이』(도리스 레싱, 민음사, 2008)의 해리엇과 데이비드 부부는 시대의 조류에 역행하는 ‘괴짜’이자 ‘변종’(p.9)이다. 노스탤지어를 꿈꾸는 이들은 1960년대 어느 연말 파티에서 만나 결혼에 이른다. 이들은 아이를 적어도 여덟은 낳겠다고 호언장담한다. 당시 영국 사회는 1950년의 이념 갈등에서 반핵, 페미니즘, 생태 운동, 세대 간 갈등을 내세우며 각 분야에서 권익을 주장하던 시기다. 그들은 이런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노력만 하면 행복은 얼마든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 굳게 믿는다. 그리고 무성한 정원을 가진 빅토리아풍의 거대한 집을 장만하여 자신들의 성을 구축한다.


매년 12명의 어른과 10명의 아이가 모여 빅토리아풍의 저택에서 휴가를 보낸다. 파티를 즐기는 이들의 생활은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꿈꾸던 완벽한 ‘낙원’이다. 가족의 유대는 너무도 공고하여 이웃은 섣불리 어울릴 수 없다. 예쁜 아이가 차례로 태어나고, 잔인한 사건이나 범죄와 같은 세상의 폭풍은 언제나 그들의 성을 비껴간다. 이들은 바깥세상의 변화에 등 돌린 채 자기들만의 요새에서 안주한다. 작가 도리스 레싱은 이들의 행복을 ‘옛날식의 행복’(p.28)이라 지적한다.


부부의 결혼 뒤 연이은 아이들의 탄생은 큰 고민 없이 당연한 과정처럼 이루어진다. 허나 시대의 흐름에 맞춰 가족의 개념도 변하는 법. 잦은 임신과 출산, 양육의 부담으로 지쳐가는 해리엇, 경제적으로 쪼들려 부업까지 하는 데이비드와 손주의 양육까지 책임져야 하는 할아버지 제임스의 늘어가는 경제적 부담, 딸의 가사노동까지 떠안는 할머니 도로시. 독자에게 이 가족의 행복은 언제라도 파괴될 수 있는 허약함으로 읽힌다. 다섯째 아이 벤의 탄생은 행복 이면의 가족의 불안과 파괴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다섯째 아이’가 주는 불안은 무엇에서 비롯하는가.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첫 순간부터 태어나기 전까지 어떤 아이인지 알 수 없는 10개월, 인간은 원하는 아이를 가질 수도, 낳을 수도 없다. 불안은 선택할 수 없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막 태어난 벤을 보며 해리엇은 “네안데르탈인 아기”(p.73)라 말하고, 이내 데이비드도 “우리와 같은 정상”(p.88)은 아니라 단정 짓고 만다. 소설에서나 있을 법한 비약일까. 누구에게나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불안이 책장 너머 독자를 자극한다.


해리엇은 이상한 외모와 폭력적인 행동을 자행하는 벤의 정체에 끊임없이 의문을 품는다. 벤은 태어나기 전부터 해리엇을 힘들게 했다. 그는 “벤이 태어난 이후 줄곧 벤 때문에 비난을 받”았고, 사람들은 스스로를 “죄인처럼 느끼게 만”(p.140) 든다. 애초에 해리엇은 자신을 탐구할 시간도, 돌아갈 일터도 없이 임신과 출산을 반복했을 뿐이다. 아이를 포기하지도 못하면서 아이가 없는 삶의 행복을 ‘감히’ 상상하는 모순은 여기서 발생한다. 학교 선생님, 친척, 소아과 의사, 요양소 직원과 같은 주변인의 ‘전문성’ 앞에서 해리엇의 모성은 무력할 뿐이다.


모성은 아기를 낳자마자 분출되는 호르몬이 아니다. 그 누구도 출산의 고통이 ‘엄마’로 살아갈 나날의 예고편이라 상상하지 못한다. 해리엇과 데이비드에게 벤은 가능성을 위협하는 장애물일 뿐이다. 벤이 실제 가하는 물리적 위해와 위협은 부모와 주변인의 시선으로 묘사될 뿐, 직접 다루어진 바 없다. 해리엇과 데이비드의 가족이 명절마다 모여 즐기는 행복에 비례하여 벤이 야기하는 불편함이 커질 뿐이다. 그렇다면 행복한 가정이 누리는 일상의 평온함은 벤 때문에 망쳐진 것일까? 구속복을 입히고, 과량의 진정제를 투여하며 협박을 일삼는 쪽은 누구였나. 주변 사람의 암묵적 동의 아래 벤을 외면하고 소외시키는 행위는 당연한가. 작가의 질문은 폐부를 찌른다.


벤을 감싸는 순간 고립되는 해리엇, 그녀는 고립을 견디다 못해 벤을 떠나보낸다. 벤의 고립은 곧 인간성의 상실이다. 작가 도리스 레싱은 우리 삶에 언제든 ‘다섯째 아이’가 끼어들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그간 내 성실한 생활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누구나 낯선 모습을 갖추고 태어날 수 있으며,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시대를 거듭해 인간의 문명이 발달해도 길들지 않은 불행이 늘 우리 곁에 남는다. 그 내밀한 곳에 희망이, 인간성이 깃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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