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다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플랫화잍 Mar 06. 2024

오늘치 다짐

“사과 한쪽 먹고 가.”

이동하는 지하철 안에서도 뛰어야 했던 바쁜 날이 있었다. 그 무렵 큰아이는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고, 둘째는 유치원, 막내는 어린이집에 막 입소한 참이었다. 아침이면 세 아이 세수시켜 밥 먹이고 내복 위로 양말을 야무지게 올려 신겨서 가방 세 개를 유모차에 주렁주렁 걸고 마지막으로 막내 아이를 태워 두 아이를 양 옆에 달고 집을 나서곤 했다.

주인을 기다리는 가방_20150824

이따금 예고 없이 찾아드는 아이들 급똥에 애간장이 타다 못해 재가 되었다. 엄마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용변을 보며, 외출채비를 다 갖춘 채 노래를 합창했다. 환장하겠다가도 차례로 제갈길보내고 나면 상대적 고요함에 멍했다가 피식, 끅끅대며 뒤늦게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지금의 웃긴 상황에 대해 가장 재미있어할 남편에게, 엄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곁에서 보는 육아의 풍경이 어여쁜 이유는 정말 힘든 순간은 기록할 시간도, 기억할 여지도 없어서가 아닐까. 오직 고운 풍경만 기록에 남길뿐이다. 그 순간만큼은 남을 부러워할 이유도, 힘든 순간을 애써 하소연할 필요도 없다.


얼마 전 희미하게 들려오는 이웃집 아이의 노랫소리가 어렴풋하던 그 순간을 일깨웠다. 요즘 큰아이는 고등학교에, 작은 아이는 중학교, 막내아이는 초등학교를 다닌다. 엄마의 일상리듬은 아이가 어떤 성장단계에 머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새로운 생활 리듬에 나를 적응시키는 것 외에 고등학생이 된 큰아이의 일상잡변을 들어주고, 적절히 맘을 어루만져주는 것, 다른 두 아이에게 빈틈이 생기지 않도록 챙기는 게 앞으로 내게 주어진 숙제다.


오늘로 큰아이 아침 라이딩 3일 차. 학교에 아이를 내려주고 돌아와 보니 중3 둘째 아이가 5학년 막내동생에게 아침밥을 챙겨주고 있었다. 깜짝 놀라는 내 얼굴을 보며 둘째는 머쓱해하며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미 놓아둔 수저에 밥 조금, 국 조금 그릇에 담아 앞에 놓아주면 그만일 테지만, 아이도 엄마도 성장했음을 서로 확인한 순간이다. 아이들도 엄마의 상황이 달라졌음을 자기들만의 속도로 체감했던 걸까. 행여 내가 힘들다는 내색을 많이 한 걸까. 가방 챙긴다는 아이를 불러 얼른 사과 한 알을 깎아 접시에 담아주었다.


오빠 손잡아_20151014

차례로 둘째, 막내 아이를 배웅하고 오랜만에 자주 들르던 카페 내 자리에 앉아, 머리를 쨍하게 깨워주는 고카페인 음료를 주문했다. 몰입을 위한 넉넉한 시간과 근사한 환경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막상 받고서도 내 몫이 아닐 것 같아 불편하고 부담스러울게 뻔하다. 멀고도 가까운 거리, 바쁜 틈에 주어진 몇 시간의 여유, 난 틈새 시간을 발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내게는 마감의 효능보다 아이의 귀가 시간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시간의 유용함, 무용함을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어떤 시간이든 쌓이고 나면 다음 단계, 새로운 방향으로 향하게 만드는 법이니까.


이 앵글 오랜만_20240306

지금 난 갈팡질팡하며 복잡한 심사를 추스르는 중이다. 언젠가는 익숙해질 일이다. 그렇다면 익숙함을 꿰뚫어 이를 통로 삼아 새로운 경험에 이르는 길. 그 초입에 있다고도 말할 날도 오겠지. 그날을 위해 놓치지 않고, 하나씩 주워 모아 기워내는 사람. 무언가 되지 못해도, 한 번에 몇 개의 삶을 살아내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 바삐 지나가는 순간을 불러 세워 사과 한쪽 깎아 대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련다. ‘정리’와 ‘기록’으로 오늘치 ‘다짐’을 나누는 사람도.

매거진의 이전글 안녕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