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지니에게 졌다고 말했다
집순이와 집돌이는 보통 집 안에서 에너지 충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MBTI로 따지면 내향형인 I에 가까운 사람들일 것이다. 집안에서 이들의 친구는 보통 넷플릭스다. 혹은 더 다양한 취미를 갖는다 하면 집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취미가 된다. 게임부터 독서, 영화, 어떤 이는 컬러링북 혹은 네일 하기까지 집안에서 내향형들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종종 재미로 하는 밸런스게임에서 30일 갇혀있는 대신 1억을 받을 수 있다면 당신은? 과 같은 선택지가 나온다. 이럴 때 내향인들은 망설임이 없다. 30일 갇혀있는 건 오히려 축복으로까지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집안에 오래 있는 건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밖순이와 밖돌이들은 어떻던가. 이들은 집 밖에서 사람을 통해 에너지를 얻는 타입들이다. MBTI로 따지면 외향형인 E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이들은 오히려 사람 많은 곳이 더 활기차게 느껴질 수 있다. 이들에게 하루에 한 번도 집 밖에 나가지 않는 날은 곤혹일 것이다. 산책이든 운동이든 약속이든 어떻게든 일거리를 만들어 나가고야 말 것이다.
그렇게 다른 집순이와 밖돌이가 만나 결혼을 했다.
처음엔 그래도 서로 다른 이들이 그렇게 삐그덕 대지는 않았다. 그 이유인즉슨 나는 집순이 기질이 있긴 하지만 여행 시에는 모드를 달리 한다. 나는 휴양지를 다니는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도시 여행을 선호하는 타입이고, 여행 시에는 최대한 많이 가는 것을 선호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미국 신혼여행은 거의 병영체험에 가까웠다. 일정을 알차게 짠 탓에 오전 7시나 8시에 나가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심하게는 그랜드캐년 투어는 전날 저녁 8시부터 시작되었다. 라스베이거스 도심에서부터 그랜드캐년 투어 장소까지 이동 거리가 꽤 있었기 때문이다. 우린 그날 뉴욕에서 라스베이거스까지 비행기로 6시간을 날아온 날, 숙소 체크인 하고 1시간 정도를 자다가 서로를 깨우며 "나가야 돼"를 외치며 투어 차량에 탑승했다. 그렇게 투어 시에는 이동하면서 자는 나날을 보냈다. 또 '미국에 언제 와보겠어'를 필두로 움직인 덕에 지인들에게 "그 기간 동안 어떻게 그걸 다했어?" 하는 놀라움은 덤으로 얻었다. 그렇게 움직이고도 싸우지 않았다. 오히려 알차게 보냈다고 좋아라 했다.
또 한동안 싸울 일이 없던 이유는 남편의 자격증 공부 덕분(?)이었다. 남편이 자격증 공부로 바쁘다 보니 주말도 나의 개인시간이 충분히 보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내향형과 외향형은 각자의 에너지를 충분히 발산하며 안정적일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황금 추석연휴에 발생하였다.
남편의 본가는 부산이다. 남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부산 본가를 운전으로 당일치기 왕복하는 사람이다. 그만큼 운전도 오래 할 수 있고 에너제틱한 사람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명절연휴는 항상 알찼다. 이번 연휴도 10월 3일 나의 본가인 강원도 방문을 시작으로, 10월 5일 밤엔 부산으로 이동, 10월 8일 부산에서 서울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움직인 나날이었다.
이쯤에서 집순이는 에너지가 다했다. 이번엔 연휴도 기니만큼 남은 연휴는 집에서 넷플릭스도 좀 보면서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그런데 남편은 아니었다. 그리고 원래 10월 9일은 한글날을 기념하여 국립한글박물관을 가기로 약속했던 날이었다. 나는 이 약속이 국립한글박물관의 개관 연기로 취소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남편은 또 다른 한글날 행사를 찾아본 후 그곳에 가려고 했던 것이다.
나는 6일을 이미 알차게 움직였으니 안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차가 막히지 않는 시간대를 선택하기 위해 밤 11시부터 새벽 4시까지 부산행, 오전 6시부터 10시까지 서울행을 겪으며 몸이 꽤나 고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편은 글을 좋아하는 나와 함께 한글날을 알차게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넷플릭스는 매일 볼 수 있지만 올해의 한글날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이다.
나는 그날 넷플릭스 시리즈의 '다 이루어질지니'를 틀었다. 포스터 논란이 조금 있긴 했지만, 그래도 김은숙 작가가 요정 지니를 대체 어떻게 드라마로 풀어냈을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한 편만 가볍게 봐볼까 하다가 결국 정주행을 시작하게 된 나는 더욱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그날 우린 나가지 못했고, 남편은 오늘 하루를 날렸다며 상심해했다. 그러나 나는 그 발언이 심히 거슬렸다. 어찌 나의 충전방식을 존중해주지 않고 하루를 날렸다고 표현하는지 나는 나대로 서운했기 때문이다. 결국 나름 험한 말(?)들이 오가며 부부싸움을 했다.
지금은 극적 화해를 하긴 했지만, 남편은 자신이 지니에게 졌다며 분통해했다.
이렇게 또 서로의 다름을 극복해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