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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면씨 Aug 18. 2019

쉬어가는 하루와 신들의 샘

플라야 델 카르멘

띠리리리-

울리는 알람을 끄고서 몇 시간을 더 잤는지 몰라.

며칠을 푹 쉬지 못한 채 여행하고, 이동하고, 구경하고.

몸에서 “너네는 안 쉬냐! 이것들아!”를 외치는 듯했어.

하루쯤은 게으르게 쉬어줘야 할 타이밍이 온 거야.




느지막한 오후가 되어서야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켰어.

전날 월마트에서 사 온 빵으로 제이는 간단히 아점을 먹었어.

나는 영국에서 사서 미리 쟁여놓은 불닭볶음면을 끓여서 끼니를 때웠어.

제이도 나도 밥을 먹고서 뭘 할까 생각했어.

밖은 이글거리는 태양 때문에 말도 못 하게 후덥지근하니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지.

날씨가 좀 선선해지면 나가야지 마음먹고 도로 누웠어.


창밖으로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서야 우리는 호스텔을 나섰어.

제이가 일을 해야 해서 가까운 스타벅스로 갔어.

에어컨 아래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우리는 각자 개인 시간을 가졌어.

제이는 사진 보정을, 나는 글을 끄적였어.

커피 값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스타벅스에서의 시간을 넉넉히 즐겼어.


여행 중에도 일하느라 바빴던 제이.


저녁이 다 되어 갈 즈음 도현이를 불렀어.

홀로 하는 여행에서 한식을 안 먹은 지 오래되었다는 도현이의 말에 저녁식사에 초대한 거야.

제이와 도현이와 같이 월마트에 장을 봐왔어.

장 봐온 것들로 요리를 하는 동안에 제이는 사진 보정을 했어.

도현이는 뭐라도 돕고 싶은 마음에 내 곁을 맴돌았지.


딱히 시킬 것은 없었지만 도와주려는 그 마음이 어여뻤어.

우리가 쓸 식기를 옮겨달라 부탁할 때엔 이미 저녁이 다 차려진 뒤였어.

저녁 메뉴는 전날과 똑같이 “빨간 돼지갈비찜”이었는데 이건 도현이의 요청이었어.

전날 “저흰 오늘 돼지갈비찜을 해 먹었어요!”라고 도현이에게 자랑 아닌 자랑을 했을 때

“으하. 저 돼지갈비찜 엄청 좋아해요.”라고 했던 것이 생각났거든.


으음~하면서 맛있게 먹는 제이와 도현이.

회사에 다닐 땐 느껴보지 못한 성취감이 느껴졌어.

도현이가 저녁을 해줘서 고맙다며 설거지를 해줬어.

야무지게 저녁을 먹고 뒷정리까지 하고.

뭔가 아쉬운 거야.


그렇지.

술이 빠졌지.


여행자의 도시는 밤이 되니 더욱 시끌벅적했어.

제이와 내가 이미 들어 귀에 익숙한 노래가 나오는 펍으로 들어갔어.

시끄러운 라틴음악이 흘러나오고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이 더위를 식히고 있었어.

이 펍에서는 젊음이 느껴졌어.


펍에서는 손님들을 위한 이벤트도 한창이었어.

바텐더가 칵테일을 만드는 테이블 위로 올라가 춤을 추는 손님에게는 무료로 테킬라 한 잔을 주는 이벤트였어.

제이는 곧장 나를 바라보았어.

“자기도 올라가 봐 키키.”

“내가? 안돼.. 나 아직 저기 위에 올라갈 만큼 취하지 않았어.”

라며 손사래를 쳤어.


머리색도 눈 색도 저마다 다른 용기 있는 여행자들이 테이블 위에 올라섰어.

서로 옆사람과 어깨동무를 하고 앉았다 일어났다도 하고 노래에 맞춰 춤을 추기도 했어.

그중 눈을 끄는 여행자가 있었는데 핫해도 너무 핫한 거 있지.

춤을 추는 그녀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환호했어.

물론 나도 환호했지.

제이?

제이는…크흠.





다음 날, 우리는 간단히 배를 채우고서 숙소를 나섰어.

물론 도현이도 함께였지.

우리는 렌트카를 빌렸어.

차는 더운 공기 속을 달려 액티비티의 도시 ‘툴룸’으로 향했어.

바로 세노떼에 가기 위해서였지.

세노떼란 암반이 함몰되어서 생긴 천연 샘으로 ‘신들의 샘’이라고 불리는 곳이야.

물을 좋아하고 다이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야.

이름도, 수심도, 풍경도 모두 다른 세노떼.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 전역에 수없이 많은 세노떼가 있다고 해.


첫 번째로 우리가 간 세노떼의 이름은 ‘크리스탈리노’였어.

이름처럼 투명한 이 세노떼는 새파랗고 초록빛으로 물든,

마치 요정이 잠시 쉬었다 가는 쉼터처럼 보였어.

파란색 물 위로 초록색 그늘이 지고,

물속에는 그늘 사이로 내리는 빛 내림이 신비로워 보였어.


맞아.

신비로운 곳.

세노떼는 신비롭고, 아름답고, 경이로운 곳이었어.


얕은 수심으로 물을 무서워하는 나도 손가락 끝이 쪼글쪼글해질 때까지 첨벙거렸어.

물 좋아하는 제이는 어땠냐고?

후후.

말하면 입 아프지.

어찌나 물 만난 고기였는지 몇 번이고 다이빙을 하고 입술이 파래질 때까지 물속에서 나오지 않았어.

도현이도 마찬가지야.

도현이는 이집트 다합에서 프리다이빙 자격증을 딴 친구로 당연히 물을 좋아하는 친구였어.


[크리스탈리노 세노떼] 제이가 좋아하는 파란색과 내가 좋아하는 초록색으로 가득 찬 곳이었다.


나는 물 위에 둥둥 떠서 피부에 와 닿는 물속과 물 밖의 경계를 느꼈어.

그건 참 오묘한 느낌이 들거든.

깊이 들어가기엔 세노떼 안을 헤엄치는 작은 물고기가 무서웠어.

작은 물고기들은 내가 보이지 않는 발 밑에서 나를 간지럽혔어.

머리 위로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발아래로는 물고기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어.


크리스탈리노 세노떼는 한국의 계곡과 비슷한 분위기도 있었어.

지글지글 삼겹살을 구워서 소주 한잔을 딱 마시면!!!

알지?

한국의 계곡 감성 말이야.

감성적인 곳에서도 한국적인 감성이 돋아나는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 사람인가 봐.


오전 한나절을 크리스티아노 세노떼에서 보낸 우리는 차를 달려 다른 세노떼로 향했어.

이번에 간 세노떼의 이름은 '앙헬리따'였어.

ANGELITA

뭔가 생각나는 것 없어?

앙헬리따는 스페인어로 천사를 뜻해.


우리가 가게 될 세노떼의 이름을 듣고서 제이에게 외쳤어.

“우와! 가면 진짜 천사들이 쉴 만큼 천국 같은 곳일까!”

“글쎄. (웃음) 사진으로 봤을 땐 진짜 멋있던데 실제로 봐야 알겠지?”

주차장에 차를 대고 우리는 옷을 훌렁훌렁 벗었어.

물론 옷 안에 미리 수영복을 입고 있었지.


천사의 샘이라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잰걸음으로 도착한 세노떼.

세노떼를 보고 든 생각은 이거였어.

“엥?”

이름처럼 아름다울 줄 알았던 것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어.

밑이 보이지 않는 깊이, 그렇다고 물이 더러운 것도 아니었어.

이 세노떼에서는 물에 들어가기가 겁이 나더라고.


망설이고 있는 나와는 다르게 제이와 도현이는 풍덩 뛰어들었어.

한 번의 다이빙을 하고 나온 두 남자는 입을 모아 말했어.

“어후.. 뭐야 이거 왜 안 보여.”

“안 보여서 무서워.”

물에 들어가지 않아도 이미 난 쫄아있었어 얘들아…


앙헬리따에는 프리다이빙 전용 슈트를 입고 제대로 다이빙을 하러 온 다이버들이 있었어.

물속에 들어가지 않은 나는 그들에게 물었어.

“물속에 어때?”

“끝내줘!"

"그래.. 근데 무서워서 못 들어가겠어."

"참! 조심해. 저기에 나무 있는 쪽에 악어 있으니까."

"뭐?! 악어??????????????"

악어한테 물려 죽어서 천사들이 사는 천국에 가게 된다고 이 세노떼 이름이 앙헬리따인가 싶은 순간이었어.


바들바들 떠는 나를 보며 제이는 말했어.

“무서우면 그냥 거기 있어. 내가 다이빙하는 동안에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되니까.”

“응.. 나 그냥 여기 있을게. 하하”

“어차피 여기에 스쿠버 다이빙하러 올 거니까:) 자기는 그때 들어가!”

“응! 응? 으응?”


나는 가끔씩 나도 모르는 우리의 계획을 그의 입을 통해 듣고는 해.

선택 장애가 있는 나에게는 하나의 로망이 있었어.

그건 바로 나를 리드해 주는 남자야.

뭘 해야 할지, 뭘 골라야 할지, 망설이는 나 대신 계획을 세우고 나를 이끌어주는.

그는 정말 내 로망을 충족해 주는 남자야.


플라야 델 카르멘에 있는 호스텔로 돌아오는 길에 자연스레 장을 봐왔어.

마치 몸에 익은 듯이 말이야.

돼지고기 짜글이에 라면 사리를 넣은 저녁을 순식간에 만들어냈어.

오늘 온종일 물놀이를 했던 터라 허겁지겁 배를 채우기 바빴지.

웬일로 음식을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비워냈어.


칠레산 와인을 마시며 세노떼에 대한 감상을 나눴어.

“내가 물이랑 친하지 않은 게 아쉬운 적은 처음이었어.”

“맞아! 누나 그래도 크리스티아노에서는 꽤 오래 물에 있었잖아!”

“그렇긴 한데.. 앙헬 리타는 물속이 어땠는지 못 봤잖아..”

“걱정하지 마 자기야! 어차피 우리 내일은 세노떼에 스쿠버 다이빙하러 갈 거니까!”


그렇게 다음 날은 스쿠버 다이빙을 하게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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