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낼 기력이 소진되었습니다.’
종이 한 장 써붙여두고 삶을 일시 정지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금의 여백에도 질타를 마지않는 숨 가쁜 세상에서, 언제나 일시 정지 기능을 간절히 바랐다.
“저 잠시만 숨 돌리면 안 될까요? 아무 흔적 남기지 않고요.”
그러나 시간은 봐주는 게 없다. 잔인할 만큼 꾸준히 흐르고 만다.
마음이 질척하게 가라앉던 날, 집에서 단 한 발짝도 나가고 싶지 않았고 단 한 사람도 마주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제의 내가 잡아둔 ‘당근’ 약속이 있었다. 취소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거래를 파기하거나 미루는 일을 저질렀다간, 한 달간 꾹 참고 샐러드만 먹다가 떡볶이를 먹은 사람이 될 게 뻔했다. 아무리 울적해도 지키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래서 꾸역꾸역 샤워를 하고, 거래할 물건과 상대에게 줄 간식까지 챙겨 약속 장소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내 마음은 여전했다. 모르는 사람들, 마주치는 모든 낯선 얼굴들이 이유도 없이 미웠다. 아무도 나를 보지 못했으면 싶었고, 혹시 누군가 나를 공격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겁 많은 강아지처럼 으르렁댔다.
그러다 문득 시야 바깥쪽에 선명한 푸른 빛이 비쳤다. 고개를 들자 새파란 하늘이 거기 있었다. 큼직큼직하게 뭉쳐 흐르는 흰 구름도 근사했다. 내 마음은 진흙탕인데 하늘은 이렇게 멋졌다. 하늘을 보고 나니 다른 풍경도 점차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벽돌담 위 장미 덤불, 여름 끝자락의 진녹색 이파리들. 내 마음이 지옥과 같아도,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항상 그 자리 그대로였다.
언젠가는 그게 원망스럽기도 했다. 내 마음이 이런데 세상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며 들리지 않을 섭섭함을 꿍얼댔다. 이제는 달랐다. 마음이 놓였다. 내 마음쯤이야 사소할 뿐이라서, 내 모난 마음에 아무도 관심 주지 않는 덕에, 시침 뚝 떼고 자리로 돌아와 앉아도 괜찮다니 외려 위로가 됐다.
삶의 모든 순간을 흰 종이에 정갈하게 쓰인 글씨처럼 여겼다. 수정액 자국조차 견디지 못해 그 장을 찢어내고 새로 다시 쓸 수 있길 바랐다. 넓고 무관심한 세상인 덕에, 내 얼룩쯤이야 너무나도 사소한 나머지 보이지 않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오늘은 사람들을 미워하고 으르렁댔어도 누구도 알지 못하고, 하늘은 여전히 파랗다. 그러니 망쳐버렸단 생각 말고 원래 자리로 돌아와도 된다. 아무도 관심이 없다고 슬퍼 말길. 하늘이 여전히 파랗다고 외로워 말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