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많은 소녀>는 생각보다도 더 힘든 영화였다. 새벽에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잠자기 전에 보기에는 정말 적절하지 않은 영화였고, 몇 번이고 멈췄다가 재생하기를 반복했다. 그럼에도 인물들의 감정이 너무 생생하게 다가와서 몰입할 수밖에 없는 영화였다. 처음에는 생활지도와 관련된 부분을 찾으려 노력하며 보다가, 나중엔 그런 생각은 할 수 없이 영화가 주는 중압감을 버티듯이 보게 됐다.
한 고등학생이 자살했다. 경민의 죽음 이후 주위 사람들이 보여주는 감정은 슬픔과 우울보다 분노와 원망이었다. 분노와 원망은 그 대상이 필요하다. 영화 초반, 사람들은 영희를 그 대상으로 정했다. 반 친구들은 마치 본인들이 정의를 구현하듯 영희의 집에 찾아가 신발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화를 내는 영희에게 폭력을 가한다. 경민의 엄마는 자식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 분노, 슬픔을 영희의 탓으로 떠넘긴다. 경민이를, 그리고 자신의 괴로움을 잊지말라는 듯이 자살 시도를 한 영희에게 병원비를 지원하고 경민의 옷을 건네주고 학교에서 마주치자 좋아보인다고 말한다. 교장은 학교에 위해가 가지 않을 만한 자살 원인을 찾고자 했다. 경민이가 우울하고 또래 친구들과 달랐기에 자살했다는, 자위를 위한 변명만을 만들어낸다. 극 후반부, 영희의 잘못이 아니라고 드러나자 사람들은 그 원망의 타겟을 다른 대상들로 바꿔 나간다.
경민은 죽었고, 그 죽음을 일으킨 사람은 없을 수도 있고 모두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적당한 이유를 만들어 내야만 한다. 누군가가 이유도 없이 죽어버린다면, 받아들이긴 정말 어려울 것 같다. 왜?라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 것이고 그 답을 계속해서 만들어낼 것 같다. 영화는 그날 경민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경민의 유서도 모호하고 영희 외 몇몇 친구들의 입을 통해서 죽음의 이유를 조금씩 유추해볼 수 있게만 한다. 경민의 입장은 들을 수 없다. 그렇게 영화를 보는 우리도 경민이 왜 죽었는지 자꾸만 묻게 된다. 누구보다 경민의 엄마는 왜?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을 것이고 그 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영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말을 해주지 않는 것이라고 계속해서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병원까지 찾아와서 영희가 계속 입 다물고 있는데 뭐가 결론이 났냐며 화를 내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그 왜의 대답으로 지목된 사람은 너무나 큰 억울함과 무력감과 폭력 속으로 몰린다. 모두가 자신을 지목하며 손가락질하는 상황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영희도 그렇게 죽음으로 나아갔다. 정말로 영희가 죽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사람들은 경민의 자살의 답을 찾는 것을 멈췄을까? 영희가 죽었다면 그 죽음의 원인은 거의 직접적으로 영희를 탓하던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영희가 죽지 않기를 기도했다.
영희가 살아 돌아온 후 사람들은 영희의 수화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박수를 친다. 다시 돌아와서 건네는 인사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영희를 가해자로 지목했을 때, 그들은 영희의 말을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고 그저 변명과 이기적인 말로 여겼다. 진실과 다르게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해석하곤 한다.
영화가 학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생활지도의 모습을 한 장면들을 꽤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활지도란 학생이 처한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것인데 영화 속 학교는 학생들에게 그런 존재는 결코 아니었던 것 같다. 상담 장면도 꽤 많이 등장한다. 초반에 담임이 경민과 가장 마지막까지 있었던 영희에게 그날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라고 한다. 하지만 영희는 그냥 아무것도 모른다고 한다. 담임은 솔직하게 말하라고 하지만, 형사에게까지 넘어갈 사건에 대해 쉽게 이야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교사도 이런 사건을 다루기가 굉장히 난감할 것 같다. 담임으로의 책임은 있으나 형사 사건으로 넘어가고, 사실관계를 마구 헤집을 수도 없는. 이런 일에 대해 학생과 대화하기 위해서 교사가 할 수 있는 선은 자신의 편견과 추측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은 채 심정적인 이야기를 나누면서 학생이 입을 연다면 서서히 그날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담임이 나서서 누군가를 일종의 용의자로 취급하고 행동하는 것은 가장 삼가야 할 것이다.
과거에 담임이 경민이가 수업시간에 음악을 듣고 있길래 핸드폰을 압수해서 도대체 이 친구가 어떤 음악을 듣고 있는지 조사를 해 보았다는 대사가 나온다. 이 친구가 도대체 어떤 음악을 듣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직접 물어보는 것까지는 용인되지만 핸드폰을 압수해서 허락도 없이 플레이리스트를 뒤지는 것은 학생 사생활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다. 생활지도라는 명목으로 학생의 개인적 영역을 침범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경민의 자살 이후 한 교사는 클리셰적인 대사를 한다. "내가 교사생활 20년에 자살을 4번 봤어. 매번 똑같아 항상 이렇게 시끄럽지. 내가 장담하건대 6개월 지나잖아? 싹 다 잊어버려. 떠들고 문제 삼는 놈들만 결국 그때 도태되는 거야. 결과는 알아서 다 나와. 영어 지문 하나 더 외우고 수학 문제 하나 더 푸는 게." 영화도 듣기 싫은 듯 대사를 중간에 끊어 버린다. 친구가 죽었다. 학생들에겐 어떤 식으로든 충격일 수밖에 없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공감도, 안심도 아닌 무관심과 냉대라는 감정을 주입한다. 누군가의 생명보다 결국 자신의 성적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공감과 슬픔은 도태되는 행동이라고. 자살을 4번이나 보았으면, 그 충격에 공감해주고 안심시켜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참 이기적이고 무관심하고 폭력적인 발언이었다. 실제로도 많이 들을만한 이야기라 더 화가 났던 것 같다.
경민의 죽음에 대한 교장의 태도도 위 교사와 같이 굉장히 무감정하다. 학생들은 말한다. “경민이 엄마한테 교장이 부탁했대. 경민이 자기 혼자 미끄러져서 죽은 걸로 해 달라고. 자살로 하면 자기들이 책임질 게 많아지니까.” 학생들도 다 안다. 직접적인 생활지도만이 생활지도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학교 내에서 교사의 행동과 선택은 모두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교장처럼 책임을 회피하고 자기가 편하기 위해 누군가의 진실을 묻어버리려는 시도를 본다면 학생들은 학교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담임은 영희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장례식장에서 재진술 하려는 영희를 골치 아파하며 교장과 형사의 말을 따라 움직인다. 네 생각밖에 안 하는 거라고 머리를 손가락으로 밀치고 “내가 먼저 죽을걸”이라는 영희에게 욕을 하며 화를 낸다.
영희가 자살시도 이후 학교로 돌아오고 나서 면담을 할 때 “사람이 누구나 살면서 잘못을 저지를 수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잘 살아가야 해. 그러려면 잊어버려야 해. 이럴 땐 좀 뻔뻔해질 필요가 있어.”라고 이야기한다. 경민의 자살이 영희의 잘못이라고 가정한 채로 이야기한다. 영희가 자살시도를 할 때까지 몰아붙여 놓고 돌아오니 이런 소리를 하고 있으면 정말 화가 날 것 같다. 담임은 자신의 잘못은 정말 다 잊어버린 사람 같다. 응원도 안 되는 이기적인 이야기보다는 신체적 장애를 겪고 돌아온 학생에게 불편한 점이 없도록 신경 써주는 등 실질적 적응에 지원해주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나도 반 학생의 자살과 같은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면, 잘 대응할 자신이 정말 없다. 적어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더해 주지는 않도록 최대한 주의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려 노력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함부로 단정 짓고 추측하고 몰아가는 것은 절대 피해야 한다는 것도 다시금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