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은 제주 4·3 사건이 발생한지 70년이 되는 날이었다. 제주 4·3은 한국 현대사에서 6·25 전쟁 다음으로 큰 인명피해를 낳은 비극으로, 이 사건의 희생자는 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의 1인 3만여 명에 이른다. 제주도는 4·3 사건 70주년이 되는 올해를 ‘제주 방문의 해’로 지정했고, 전국 각지에서 기념 행사·전시가 열렸다. 한국교원대신문은 제주 4·3 사건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알아보았다.
제주 4∙3 70주년 네트워크프로젝트 잠들지 않는 남도
<제주를 넘어, 4∙3 영화특별전>
지난 6일부터 8일까지 성북구 아리랑시네센터에서 4∙3 관련 영화 상영과 관객과의 대화 등으로 구성된 ‘4∙3 영화특별전’이 열렸다. 이 영화특별전은 4∙3 70주년을 기념하여 그간 터부시되어왔던 해당 사건을 복원하고 재조명하고자 기획됐다고 한다. 총 3개의 섹션으로 나뉜 9편의 영화가 상영됐다. 각 섹션의 주제는 영화 속에 제주의 모습을 담는 오멸 감독의 작품이 주된 <오멸 감독의 제주, 끝나지 않은 역사>, 4∙3의 생생한 기억과 재현을 돕는 <다큐, 기록과 기억 사이>, 그리고 4∙3을 장르극 속에 녹인 <장르, 비극적 역사의 재구성>이다. 한국교원대신문에서는 두번째 섹션 <다큐, 기록과 기억 사이> 중 조성봉 감독의 <레드헌트2: 국가범죄>에 대해 주로 이야기하겠다.
<레드헌트2: 국가범죄>
레드헌트 연작은 1990년대 후반의 영화이다. 당시 4∙3에 대한 이야기는 공론화되지 못했고 4∙3의 피해자라는 것이 밝혀지면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히기 마련이었기에 사람들은 그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곤 했다. 당시 이념적으로도 민감한 문제였던 4∙3을 다룬 조성봉 감독의 <레드헌트>는 상당히 과감한 시도였고 국가는 이 영화에 탄압을 가했다. <레드헌트>는 이적표현물로 규정됐고 조성봉 감독은 국가보안법에 저촉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에 공식적으로 상영을 하기는 어려워 제주도에서도 성당 지하에서 200여 명이 모여 몰래 이 영화를 봤다. 그러나 이 과감한 시도는 소중한 기억을 남겼다. 4∙3을 겪고 4∙3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음성을 영화 속에 남긴 것은 지금과 같은 훗날 사람들이 4월의 제주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큰 고통이 남겨졌는지 알아가는 데 의미있는 기록이 됐다.
<레드헌트2: 국가범죄>는 4∙3이 아닌 또다른 국가범죄를 보여주며 막을 연다. 광주민주화항쟁의 유가족이 자식의 무덤을 부여잡고 오열하는 장면 이후 “1980년 5월 나는 대학생이었다.”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그리고 ‘1945년 8월 나의 아버지는 스무살이었다.”라는 말이 이어진다. 이 두 문장의 병렬은 아버지와 감독 본인의 세대에 있었던 사건들을 이어 4∙3, 여순사건 그리고 광주민주화항쟁 등 국가범죄가 되풀이 됐음을 보여준다.
<레드헌트2: 국가범죄>의 대부분은 4∙3 피해자들의 증언들로 채워져 있다. 그 당시 아이였던, 엄마였던, 아들이었던 제주 주민들이 본인들의 목소리로 기억하기 힘들지만 잊을 수 없는 그 끔찍한 사건들을 이야기한다. 어떤 분은 총상을 입은 자신의 상처 자국을 드러내 보여주기도 한다. 역사는 계속 이야기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레드헌트>는 이러한 이야기를 사건의 당사자로부터 직접 듣고 이를 영화적으로 재현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재현은 당시 4∙3을 겪지 못한 세대에까지 이것이 역사로 남고 이야기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빨갱이’, 공산주의자의 폭동이라는 명칭이 덧칠되어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과거를 벗어나 <레드헌트2: 국가범죄>에서처럼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피해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영화 상영 후, 역사문제연구소 배경식 부소장과 조성봉 감독이 대화를 나누고 중간에 관객들이 궁금한 점을 질문하는 방식으로 감독과의 대화가 진행되었다.
Q. 레드헌트 1편의 서사구조와 2편의 서사구조가 달라진 이유는?
A. 96년에 <레드헌트>가 만들어졌다. 그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든 것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를 받았다. 당시 수사관들이 영화의 내레이션을 문제 삼고 다큐멘터리가 왜 이렇게 주관적이냐고 했다. 그들에게 수사 후 나가게 되면 영화에서 내레이션 없이 피해자들 영상만 보여주겠다고 했다. <레드헌트 2, 국가범죄>는 제주 4.3이 국가가 저지른 범죄 행위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리겠다는 목적과 생각을 가지고 만들었다. 실제 사례들을, 되도록이면 많은 지역에서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으려고 노력했다. 특히 4.3 사건을 상징하고 대변하는 인물을 찾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
Q. 다큐멘터리 촬영 중 어렵고 힘들었던 점이 있다면?
A. 제주 4.3을 영상이라는 매체를 통해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를 많이 고민했다. 영상 미학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거의 고민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상당히 거칠다.
많은 사람들이 배타성과 피해의식으로 제주도 사람들이 마음을 열지 않아 힘들게 작업 했을 것이라고 오해하는데 사실 제주도에서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다. 제주도 사람들은 자기 자식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문제를 육지 사람이 관심을 가져줘서 오히려 고마워했다. 작업 과정에 제작비를 후원받지 않아 경제적으로 힘든 것 외에는 정신적으로는 힘들지 않았다.
Q. 감독님께서는 가해자의 주체를 서북청년단, 경찰, 군경토벌대, 미군정, 이승만 이렇게 다섯 가지로 나누었다. 가해자에 대한 책임 추구가 피해자의 보상과 같은 문제로 추진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도 가해자의 범주를 다섯 개로 나누고 가해자의 증언이 들어가 있는데 영화에서 나온 우호적인 가해자가 아닌 정말 사실적인 가해 실상을 알 수 있는 가해자의 인터뷰, 자료 등을 찾아낼 수 없었는가?
A. 인터뷰를 다 거부했다. 몰래 영상이나 음성을 따고 싶지는 않았다. 설득을 했는데 설득당하지 않는 사람은 굳이 인터뷰하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에서 나온 경찰서장, 서북청년단, 경찰 출신 가해자들은 그분들이 이야기하겠다고 해서 인터뷰를 받았고 나름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고 반성적 자세를 가지고 있기에 가능했다.
Q. 4.3의 해결을 위해서 가장 시급한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또한 앞으로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었으면 하는가?
A. 제주 4.3의 핵심은 국가가 저지른 범죄라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제주 4.3을 사과했고 문재인 정부도 그 부분에 대해서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가 제주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서 충분히 노력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학살의 주체인 국가가 진상 규명, 책임자 규명을 정확하게 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태에서 국가가 전체 식순을 마련하고 추모제, 위령제를 주관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4.3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활동을 해온 연구자, 시민단체, 유가족 중심으로 위령제와 추모제가 진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피해자 보상에 대한 문제에서 개별 보상 문제는 반대한다. 공동체 보상 형태가 되었으면 좋겠다. 의료센터나 그 이후로도 관여했던 사람들에 대한 장학금 등의 공동체 보상 형태로 보상하면 4.3과 관련 없는 사람들도 이득을 볼 수 있게 되어 공동체적 선을 이룰 수 있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개별적으로 보상이 이루어져 만약 역사의식 없는 사람들이 돈을 받아서 쓰게 되면 역사적으로 희생된 사람들에게 보답하는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성북예술창작터, 성북예술가압장 – 너븐숭이 유령>
<잠들지 않는 남도>가 전시되고 있는 서울의 여섯 공간 중 두 곳을 가보았다. 성북구에서는 ‘너븐숭이 유령’이라는 이름의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너븐숭이’는 하루 만에 가장 많은 주민이 학살 당했던 장소로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의 배경이 되는 장소라고 한다.
이 전시에서는 총 11명의 제주, 서울 작가가 제주 4∙3의 정신을 표현한 작품들을 통해 4∙3의 본질에서부터 여러가지 사회적 사건 그리고 개인적 트라우마까지 시선을 확장하고자 했다.
<도서전시>
제주 4∙3을 최초로 실은 소설인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을 중심으로 관련 콘텐츠를 전시하고 있는 아리랑도서관에 찾아가 봤다. 전시는 4월 30일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원문 : 한국교원대신문 414호 2018.04.16
http://news.knue.ac.kr/news/articleView.html?idxno=1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