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필름 카메라와 떠난
50일 버킷리스트 여행

00 내 손에 있는 건 필름 카메라뿐이지만

by 프레세페

할아버지는 내게 항상 말씀하셨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중요한 건 돈이 많은 것도,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라, 꿈을 가지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돈이 많아서 어디든 갈 수 있을지라도, 어디에 가보고 싶다는 꿈을 잃으면 안 된다고.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께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비단 '너는 꿈이 무엇이냐'였다. 장래희망이 매년 바뀌었지만 나는 늘 내 꿈을 상상했고, 지난 오늘을 정리하는 일기보다 버킷리스트를 적는 게 더 중요했다.

나는 영화감독이라는 장대한 포부를 가지고 대학에 들어갔다. 이룰 수 없는 직업이라며 모두가 나를 걱정할 때, 할아버지는 유일하게 나의 선택에 박수를 쳐주셨다. 대학교 입학식 때 할아버지께서 주신 프리지아 꽃다발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프리지아의 꽃말이 '당신의 출발을 응원합니다'라고 말해주신 할아버지의 목소리도.

할아버지는 그 뒤로 나에게 종종 꿈이 뭐냐고 물으셨다. 나는 그 대답에 영화감독이 되는 거라고 대답했다. 그때 할아버지는 쾌쾌한 가죽 냄새나는 수첩을 건네며 말씀하셨다. 오늘 저녁에는 꼭 어떤 걸 먹어야지. 내일은 꼭 읽고 싶었던 책을 읽어야지.라는 것도 꿈이 될 수 있다고. 어쩌면 그 꿈들이 모여서 가장 커다란 꿈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른다고. 할아버지가 건네주신 가죽 수첩은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여름방학을 맞이하며 적은 버킷리스트가 적혀 있는 수첩이었다. 수첩은 오래된 기억처럼 매캐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수첩에 적힌 버킷리스트는 조금은 무뎠던 내 가슴을 둥둥 울리게 했다. 조금은 낯설지만 익숙한 10년 전의 내 글씨가 말갛게 보였다. 순수함에 꾹꾹 눌러쓴 글씨들이 가슴에 하나씩 새겨졌다.


북극에 가서 오로라를 보기

순록 자격증 따기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가기

우즈베키스탄에서 양꼬치 먹기

내가 사랑하는 나라에서 한 달간 살기

외국인 친구에게 기억에 남을 선물하기

...


그 버킷리스트를 적었던 10년 전의 나에게 그저 꿈이었을지 몰라도, 이제는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바로 인터넷으로 다니고 있던 학교에 휴학 신청을 넣었다. 내가 다음 학기에 찍을 영화를 위해 모아두었던 제작비와 여행을 위해 더 필요한 돈을 계산했다. 그때, 내 눈은 처음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가지게 되었을 때보다 더 빛났을지도 모른다.

여행을 위해 준비물을 생각했을 때, 나도 모르게 할아버지의 필름 카메라를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비단 버킷리스트를 이루기 위한 여행이 할아버지 덕분에 시작된 게 그 이유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신의 출발을 응원한다고 말씀하신 할아버지의 목소리처럼 매 순간 찰칵거리는 셔터음이 나의 여행의 순간순간을 응원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지럽게 찍혀서 기억 저편에 까먹고 있는 디지털 사진이 아니라, 쾌쾌한 먼지 냄새가 나는 수첩에서 시작된 여행인 만큼. 낡은 필름 카메라가 어쩌면 이 여행과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그렇게 나는 준비 없이 한 손에 할아버지의 필름 카메라만 들고 버킷리스트를 이루기 위한 여행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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