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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니작가 Jan 31. 2024

두바이에서 자발적 맥시멀리스트가 되다

딱 ‘반만 나다운’ 집

   

 우리나라 IMF 사태는 나의 호주 생활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여기서 편입해서 대학을 다니려고 했는데 모두 물거품이 됐다. 대부분의 환전소는 한국 돈을 받지 않았고 하늘 끝까지 치솟는 환율 때문에 바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이러다가 우리나라가 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두려웠다. 짐이 워낙 없었기 때문에 아주 가볍게 한국에 들어왔지만 마음은 너무 무거웠다. 경제가 어려워지니 내 방을 갖는 건 더욱더 힘들어졌다. 집안을 꾸민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도 없었다. 집안이 힘들어지니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을 받아야 했고 다시 과외로 용돈벌이를 했다. 이렇게 비자발적 무소유를 지향하며 더 좋은 날이 올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았다.     

 대학교 4학년 때 진지하게 미래를 고민했다.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니고 싶어서 토플 공부를 해서 나름 좋은 점수를 만들었다. 하지만 지원 자격이 다 돼도 재정적인 건 채우기가 어려웠다. 준비하면서도 힘들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시작이라도 해야 후회하지 않을 거 같았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현실의 벽에 부딪히니 어떻게 하면 외국에서 살며 원하는 걸 하면서 돈을 벌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이러다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외항사 승무원이라는 직업을 떠올렸다. IMF 외환위기 때 영어면접을 본 후 합격하면 승무원 학원비를 100프로 지원해 주는 해외취업 장려프로그램이 있었다. 감사하게도 인터뷰에 합격해서 서비스 경험이 전혀 없는 난 1년간 열심히 준비를 해서 에미레이트 항공에 입사했다.     


 두바이는 나에게 천국이었다. 20대 후반에 드디어 나만의 방을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거실과 부엌도 생각보다 컸다. 이렇게 넓은 공간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처음으로 갖게 된 방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니 작은방보다는 넓은 거실을 멋지게 채우고 싶었다. 이란인 룸메이트는 이미 거실을 멋지게 장식해 두었다. 물 담배인 시샤뿐만 아니라 원래 회사에서 제공하는 소파를 사용하지 않고 본인만의 아랍풍의 카우치를 따로 사용했다. 이런 앤티크 한 거실에서 룸메이트와 대화하며 보내는 시간이 즐거웠다. 나도 거실 꾸미는 데 일조하고 싶어서 참고 참았던 물욕이 폭발했다. 새로운 곳에 비행을 갈 때마다 거실에 어울리는 아이템을 사다 나르기 시작했다. 넓은 거실을 어떤 물건으로 채울지 고민하는 시간이 행복했다. 거실과 부엌은 룸메이트와 같이 사용했기 때문에 물건의 유무가 영역을 표시하는 느낌이 들었다. 룸메이트가 특이한 아이템을 사 오면 어디 나라에서 사 왔는지 물어보고 내가 더 사 올만한 게 있는지 물어보면서 우리만의 공간을 꾸미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룸메이트가 결혼하며 이곳을 떠나게 되면서 채워졌던 공간이 다시 비워지게 됐다. 커다란 아랍풍의 카우치가 빠지니 공간이 텅 비어 보였다. 더 공격적으로 물건을 사기 시작했다. 하나 살 걸 두 개 사면서 부족한 거보다 넘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거실은 하나의 지구 같았다. 한 곳은 케냐 나이로비에서 산 마사이 부족 관련 기념품부터 목재 장기판과 동물 모형으로, 반대쪽은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사 온 촛대와 다양한 인센트 스틱들, 그 옆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사 온 에펠탑 모형, 러시아 인형인 마트료시카 등 전혀 어울리지 않은 장식품들로 거실은 넘쳐났다. 나름 나에게는 이렇게 꾸미는 게 내 삶의 행복이고 보람이었고 비행하는 이유였다. 거실은 어떤 콘셉트도 없이 그냥 기념품을 보관하는 장소였다. 두바이 집에 있는 예쁜 잡동사니를 더 이상 둘 공간이 없으면 서울 집에 분리수거했다. 두바이 집 거실이 정리가 되면 서울 집은 그만큼 복잡해졌다.    

 

 두 번째 룸메이트가 들어왔다. 태국 룸메이트도 거실을 꾸미는데 아주 열성적이었다. 처음부터 가져온 짐이 정말 많았고 비행을 다녀올 때마다 거실에는 새로운 것들이 나를 반겼다. 이 친구는 오자마자 거실에 커다란 삼성 플랫 티브이를 샀다. 소파가 빠진 공간이 티브이로 채워졌다. 신실한 불교신자인 룸메이트는 불상부터 가지각색의 양초와 염주 그리고 목탁으로 거실을 경건한 절처럼 만들었다. 이때가 겨울쯤이어서 나는 유럽 비행 때마다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크리스마스 장식품들을 사다 날랐다. 신실한 불교신자인 룸메이트와 믿음이 투철하진 않지만 열심히 교회 다니는 크리스천이 함께 하는 종교통합 거실이었다. 불교와 기독교가 이 작은 거실에 공존했고 나름 오묘한 조화를 이뤘다. 룸메이트는 비행 생활이 조금 힘들게 느껴졌는지 1년도 채우지 못하고 그만뒀다. 또 거실을 채웠던 물품의 반이 사라졌다. 비워져 있는 공간을 채우는 일이 내 일이었다. 비행을 가면 내 물건을 사는 것보다 거실을 꾸미는 용품을 사는데 집중했다.  

   

 이번엔 싱가포르 룸메이트였다. 너무나 착하고 배려 깊은 친구였다. 친구는 거실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고 방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거실을 꾸미는데 전혀 관심이 없으니 편하게 내가 원하는 스타일로 장식해도 된다고 했다. 이 거실의 반만 나의 공간이었는데 이젠 두 배로 커졌다. 내방은 딱 필요한 것들만 있어서 호텔 룸처럼 깔끔했지만 거실은 나의 소중한 오브제들로 차곡차곡 쌓여갔다. 냉장고 표면은 비행할 때마다 모은 마그넷으로 가득 채워져 답답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마그넷 사는 걸 멈추지 못했다. 마그넷이 냉장고를 덮을수록 비행한 세월이 늘어나서 뿌듯했다.     


 이렇게 4년이 흘렀고 대한항공으로 이직을 하면서 단기간에 많은 장식품들을 정리해야 했다. 예뻐서 구매한 용품들은 이젠 처리해야 할 골칫거리가 됐다. 가지고 갈 수 있는 짐의 양은 정해져 있어서 최대한 빨리 정리를 해야 했다. 하지만 새 물건이 아니라서 누군가에서 주기도 미안했다. 지인들에게 필요한 거 있으면 가져가라고 했지만 이런 장식품보다는 생필품에 눈길을 줬다. 나의 비행 생활을 대변하는 오브제들이라 버릴 수도 없었다. 나름 나에게 의미 있는 수집품들은 어떻게든 가져가기로 마음먹었다.    

 

 짐을 선박으로 보내서 서울에 한 달 후쯤에 물건이 도착했다. 서울 집에도 나만의 방이 생겼지만 거실은 이미 부모님의 용품으로 포화상태여서 두바이 짐은 포장된 상태로 그대로 계속 방치됐다. 솔직히 너무 양이 많아서 꺼낼 엄두조차 낼 수 없었고 바로 대한항공 훈련 시작이라서 짐을 정리할 시간도 없었다. 이렇게 나의 두바이 짐들은 2년 동안 바깥세상을 구경하지 못했다. 나의 기린들과 사자들 그리고 크리스마스 장식품들은 그들의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혀있었다. 여러 번 고민하며 신중하게 산 오브제들은 이렇게 나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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