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보는 그림 이야기>
코엑스몰에 가기 위해 삼성역에서 내렸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여파로 어디론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은 없었다. 코엑스몰에 들어서자 빼곡히 들어찬 상점들의 현란한 상품들이 왠지 풀 죽어 보였다. 드문드문 사람들이 보였지만 쇼핑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무뿌리처럼 뻗은 통로와 촘촘한 편의시설들은 텅 빈 개미집이나 벌집을 연상시켰다. 눈부신 인공의 광선들이 신기술을 뽐내며 이미지를 쏟아냈다. 기둥을 감싼 디지털 디스플레이가 나를 유혹해서 정신이 혼미해졌다. 쇼핑센터에 오면 에너지가 솟아 지름신을 받아들이던 시절이 있었다. 가까운 대형마트에 가도 기분이 좋았다. 넓은 공간과 높은 천장 매대에 가득한 상품들을 보다 보면 뭘 사러 왔는지 잊어버리고 마지막 기회를 얻는 것처럼 할인상품을 카트에 담았다. 하지만 요즘은 인터넷으로 살 수 없는 술을 사러 마트에 갈 뿐이다.
방향감각이 떨어지는 나는 거대한 미로에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간혹 지나치는 사람 중에는 쇼핑이 목적이 아니라 공간의 이미지를 즐기러 온 사람들이 있었다. 바쁘게 걷는 사람들 틈에 조형물이나 디지털 디스플레이 기둥 앞에서 셀카를 찍으면서 천천히 산책하는 사람들이다. 수많은 이미지가 유영하는 동굴을 헤매다보니 머리가 복잡해서 잠시 쉬다 가려고 앉을 곳을 찾았으나 마땅한 곳이 없었다. 그나마 발견한 곳은 ‘별마당도서관’ 서점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옆 계단 형태의 구조물이었다. 그곳은 벌써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어서 내가 앉을 자리는 없었다. 다시 잠시 쉬어갈 자리를 찾아 동굴을 방황했다. 겨우 찾은 벤치는 화장실 입구에 있는 신세계TV쇼핑 멀티비전 앞에 있었다. 특별히 제작한 플라스틱 큐브 같은 벤치에 앉아서 쉬려면 광고를 봐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 같았다. 광고가 보기 싫어 뒤 돌아앉아 걷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벤치에 앉아 눈이 피로하여 잠시 감고 있었다. 디지털 디스플레이를 통해 망막에 비쳤던 이미지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동안 많은 정보를 섭취하기 위해 디지털 기기 화면을 볼 때 스크롤을 빠르게 내리면서 주로 한쪽 눈으로만 읽어왔다. 그러다보니 디지털 난독증에 걸렸다. 시각 정보를 뇌로 전달하여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떨어진 것이다. 온종일 스마트폰 피시 화면에 눈을 떼지 못하니 블루 라이트 노출에 메마른 두 눈은 만성피로에 시달리고 있다.
가방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끊임없이 피어나는 디지털 디스플레이 발광 이미지를 필터를 통해 가라앉히고 싶은 속셈이었다. 선글라스의 밤색 필터를 통해 거대한 미로를 바라보니 오히려 더 선명해 지면서 사람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 사람들은 내 피사체가 되길 거부한다는 듯이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 거대한 미로 안에서 사람들은 걸어야만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눈부신 인공의 광선들 때문에 쇼윈도의 마네킹 같았다. 바쁘게 걷는 사람은 역동적이어서 세상을 가로질러 자신의 목적을 향해 성큼 다가가고 있는 듯했다. 반면 벤치에 앉아 운동화를 벗고 발을 주무르는 나는 역동적인 세상에서 소외된 기분이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디지털 디스플레이의 이미지와 걷는 사람은 같은 리듬을 탔고, 거대한 미로의 아케이드를 다 돌아보지도 못하고 주저앉은 나는 ‘별마당도서관’ 천장까지 뻗은 거대한 책꽂이에 꽂힌 책 같았다. 사람보다 높은 칸에 꼽힌 책들은 책이 아니라 웅장한 분위를 자아내는 장식품의 일부였다. 기운을 차리고 일어나 거대한 미로를 구석구석 살펴보기 시작했다. 통로를 따라 더 깊숙이 진입하자 뭔가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디지털 디스플레이와 CCTV가 나를 계속 스캔하는 것 같았다. 나는 걸으며 내 선글라스에 부착된 비밀 카메라로 녹화하듯이 눈에 힘을 주고 두리번거렸지만 디지털 난독증처럼 무엇을 보고 느끼는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여 미로를 탈출하고 싶었다. 코엑스몰에 가기 위해 전철을 탔을 때는 기분 전환을 위해서였는데 이곳에 와서 보니 감정적인 감금 상태가 되어 벗어나고 싶었다. 거대한 미로의 아케이드의 출구는 찾기 힘들었다. 화살표가 그려진 이정표가 천장에 달려 있었지만 그 바탕색이 주변 색과 획연히 구별되지 않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거대한 미로를 탈출하자 웅장한 아셈타워 빌딩이 티 없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햇살을 반사하고 있었다. 선글라스를 껴도 눈이 부셨다. 타워와 쇼핑몰은 사람과 돈을 모으기 위한 건축이기에 욕망을 상징하지만 그 자체는 욕망을 갖지 않은 그냥 구조물인지도 모른다. 나는 아셈타워 앞 옥외 전광판의 선명한 이미지에 압도되어 한참을 바라보았다.■
푸른빛이 도는 라이방을 끼고 옷 방 거울 앞에 섰다. 왁스를 발라 머리를 쓸어 올리고 고개를 까딱거리며 한참 동안 거울을 바라봤다. 앞머리가 1㎝만 더 길었으면 더 멋있을 것 같았다. 오늘은 매트릭스에 나오는 스미스 요원처럼 검정 양복에 흰색 와이셔츠, 검정넥타이로 멋을 냈다. 내 모습이 남의 눈에 어색해 보이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자꾸 쳐다보면서 멋있다, 괜찮다, 주문을 걸었다.
라이방을 끼고 간 곳은 전철역과 연결된 대형 지하 쇼핑몰이었다. 그곳은 낮과 밤의 구분이 없었다. 나무뿌리처럼 뻗은 지하 통로가 그물처럼 느껴졌다. 대리석 바닥과 하얀 조명이 만들어 내는 눈부신 인공의 신이 상점 입구에서 나를 유혹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쳐다봤다. 내가 돋보이는 것 같아 야릇한 쾌감을 느꼈다. 라이방은 묘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싫을 때는 시선을 더 끌었고, 시선을 받고 싶을 때는 시선을 끌지 않았다. 오늘은 나를 쳐다보는 사람이 많았다. 새로 산 검정 양복 때문인 것 같았다.
상점마다 흘러나오는 음악 간의 불협화음 때문에 흥분되었다. 어디론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자 깊은 물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나를 힐끔거렸다. 내 모습에 자신감이 생겼다. 사람들은 먹이를 찾아 유영하는 물고기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물고기들이 내가 먹이인 양 나를 툭툭 건드리고 지나갔다. 감히 나를 건드리다니 스미스 요원이 무섭지도 않은가, 기분이 살짝 나빠진 상태로 상품으로 둘러싸인 현란한 미로를 정처 없이 헤매다 길을 잃었다. 다리가 아파 잠시 앉을 곳을 찾아 둘러보니 분수대를 중심으로 벤치가 여러 개 있었다. 그곳엔 쇼핑이 목적이 아니라 상품에 눈먼 쇼핑객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빈자리를 향해 걸어가면서 사람들을 하나하나 관찰했다. 라이방의 짙은 렌즈는 안 보는 척하면서 볼 수 있고, 보는 척하면서 딴 데를 볼 수 있다.
벤치에 앉아 있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가짜 라이방을 끼고 있었다. 검고 탁한 렌즈 너머 그의 눈동자가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는지 아니면 딴 데를 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도 검정 양복에 흰색 와이셔츠, 검정 넥타이였다. 스미스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을 발견한 순간 기분이 잡쳤다. 스미스를 저주하듯 노려보았다. 어떤 놈인지 계속 관찰하기로 했다. 스미스도 나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나는 스미스의 맞은편 벤치에 가서 앉았다. 스미스와 나는 서로 보는 듯, 보지 않는 듯 앉아 있었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고 정면을 응시했기에 서로 바라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지만 스미스가 나를 바라본다는 팽팽한 긴장감에 오기가 생겼다. 스미스가 나를 쳐다보지 않을 때까지 나도 스미스를 뚫어지게 쳐다보기로 했다.
스미스가 벌떡 일어나 나에게 걸어왔다. 스미스는 제법 덩치가 컸다. 겁이 났지만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태연하게 정면을 응시했다. 스미스가 내 앞에 당당하게 서더니 내 어깨를 툭 쳤다.
“너 민석이 아니니? 최민석?”
모르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을 지칭하는 순간 민석이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이러세요. 사람을 잘못 본 모양입니다.”
“나야, 이광민. 숭실고 삼학년 때 같은 반이었잖아.”
숭실고는 맞지만 광민이가 생각나지 않았다. 스미스는 가짜 라이방을 두 손으로 천천히 벗고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라이방을 벗은 이광민을 관찰하는데 그가 잽싸게 손을 뻗어 내 라이방을 벗겼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이 사람이 미쳤나.”
눈이 부셨다.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빤히 쳐다봤다면 어떤 불상사가 생겼을지 몰랐다. 이광민은 벗었던 가짜 라이방을 쓰고 다시 스미스가 되더니 자세를 낮춰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아닌가?”
나는 스미스의 손에 들고 있던 내 라이방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스미스가 라이방을 건네고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민석이 맞는데…….”
스미스가 내 앞에서 사라졌다. 나는 라이방을 끼고 벤치에 앉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걸어가는 여자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여자들을 마음껏 쳐다볼 수 있는 라이방 덕분에 차츰 가슴이 진정되었다. 여자들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
저녁때가 다돼서 집에 왔다. 라이방을 벗고 졸업앨범을 꺼냈다. 단체 사진에선 광민이를 찾을 수 없었다. 예전엔 몰랐는데 사진 속 아이들의 얼굴은 하나의 틀로 찍어낸 것 같았다. 단지 머리 모양만 다르고 미묘하게 표정이 달라 여러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똑같은 교복을 입어서 그런가하고 다시 들여다보았는데 아무리 봐도 한 사람을 계속 복사해서 붙여놓은 것 같았다. 단체 사진에선 나도 찾을 수 없었다. 그중 한 아이가 나와 닮은 것 같아서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모든 아이가 나 같았고 모든 아이가 한 아이 같았다.
졸업앨범을 뒤져 개별 사진에 나온 이름을 찾았다. 광민이는 전부 세 명이었다. 모두 내 앞에서 라이방을 벗었던 그와 닮았다. 광민이를 포기하고 나를 찾았다. 이름으로 겨우 나를 찾을 수 있었다. 겁먹은 눈빛이었다. 졸업앨범을 찍기 전날 개성을 살리려고 앞머리를 너무 짧게 잘라서 속상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머리를 자르고 미용실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집에 가는 길에 만난 친구가 이마가 많이 드러나서 멍청해 보인다고 했을 때 머리카락을 다시 붙이고 싶었다. 졸업앨범과 지금 거울 속의 나를 비교해 보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멍한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내일 날씨가 좋으면 최민석이 되어 야외공원에 가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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