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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라빛 Nov 24. 2021

시대가 외면해야 걸작이 탄생한다.


시대가 외면한 그림에는 걸작이 탄생한다.


고전주의, 캔버스 유화,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오달리스크> 루브르미술관


 

19세기 파리는 화가들의 천국이었다. 나폴레옹 3세의 문화정책은 살롱의 부흥을 가져왔고, 황제까지 직접 참여해서 당선작을 선정할 정도였다. 살롱이야말로, 부와 권력 그리고 명예를 한번에 거머쥘 수 있는 기회의 장소였다. 살롱에서 국가의 공식 '화풍' 탄생되었는데, 지금의 미대입시와 같이 아카데미가 권장하는 기법이라는 것을 대상을 정하여 정밀하게 묘사하고 물감 칠을 매끄럽게 하는 것이었다. 주제도 과거 전통적인 환가들이 다룬 내용들에 충실한 것일수록 높은 점수를 부여받았다. 그러니까. 피카소 풍의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그림은 멸시와 비판을 받고 시대적 아름다움을 잘 그려낸 그림만이 인정받는 시대였다. 파리에서 화가가 된다는 것은 부와 명예를 거머쥐는 것이었지만, 상황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국가의 취향에 어긋나는 그림들은 이상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는데, 문제는 살롱의 규칙에 충실히 따르느냐 새로운 것을 추구하느냐 그것이었다.


이상과 현실

대세와 소신

부와 가난


결국 가난한 예술가냐 vs 타협하는 화가냐의 문제다.

화가의 문제만이 아니다. 작가, 댄서, 연예인 등 예술을 창조하고 자신의 감정을 어떤 식으로든 표현하는 예술가 모두의 문제이다. 연예인들이 원하는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이르기까지는 흔히 무명시절을 거쳐야만 한다. 닥치는대로 시대가 원하는 작품을 그리거나, 쓰거나 할 수 는 있다. 하지만 그 후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진정 표현할 수 있을까? 어느새 상업주의, 자본주의 물든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고민을 하는 것이다. 여기 과감히 시대의 흐름을 반대하며 자신의 소신을 굳건히 지킨이가 있다. 바로 장 프랑수아 밀레이다. 시대가 거부한 것인지 화가 자신이 거부한 것인지 생각해볼 문제이다. 어느쪽이든 나쁠 것은 없다. 시대가 외면해야 걸작이 탄생하니까 말이다!  



인간과 자연을 통해 그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


국가와 권력의 상징, 신고전주의를 버리고 그 누구도 그리지 않던 대상 <농민>을 주인공으로 그림으로써 민주주의, 사회화를 실현시킨 시작은 장 프랑수아 밀레였다.

 

목탄 스케치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자화상> (1847)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그는 8형제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농촌 출신으로 태어났다. 정규교육은 초등학교로 그쳤지만 자신의 꿈인 화가 수업을 위해 도시로 상경하였다. 하지만 그도 처음부터 농부를 그린 것은 아니었다. 화가의 작품을 유일하게 대중에게 알릴 수 있는 길은 살롱(Salon)이었고 수차례 낙선 끝에 1840년 초상화 한 점이 당선된 것에 힘입어 초상화가로 활동했다. 초기 초상화는 얼핏 고전주의 화풍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인물의 특징과 성격, 내면이 그만의 방식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밀레의 '만종'에서 느낄 수 있는 인간주의, 사실주의 화풍이 이때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왼) 파르당의 초상(1841), (오)폴린-비르지니 오노의 초상(1844)



그는 왜 농부의 그림을 그려야만 했는가?


오른쪽 그림의 주인공은 바로 밀레의 첫 번째 부인이다. 그후로 로코코풍의 목가적 회화와 누드화도 그렸으나 결국 가난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결핵으로 부인이 사망하고, 두 번째 부인을 맞이하게 되는데 여기서부터 그의 불행이 시작되었다. 한 카페 여종업원이었던 그녀는 가난했지만 전형적인 가톨릭 가정의 밀레 가족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가 사망할 때까지 고향을 찾지 않고 그녀와 살며 아홉 명의 자녀를 낳았다. 당시 화가로서 수입이 아예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워낙 책임질 가족이 많다보니 상대적으로 궁핍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바르비종이라는 파리 근처 작은 마을로 거처를 옮기게 되는데 이때부터 그의 자연주의 풍경화 '바르비종 화파(Barbizon School)'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1848년 바르비종에서 작업은 했지만 이들과 달리 풍경보다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한다.


일하는 농부에게서 발견한 뿌리
(왼) 키질하는 사람(1848), (오) 씨 뿌리는 사람(1850)


그는 신화나 종교 속의 장면을 상상해서 그리지 않고, 현실과 자연에서 만난 평범한 인간과 자연을 배경으로 '일하고 있는 농부'를 그림의 주제로 삼았다. 키질하는 사람은 1848년 살롱전에 출품한 것으로 '농부의 화가' 이름을 알리는 작품이다. 인물의 얼굴을 자세히 묘사하지도, 배경이 명확히 드러나지도 않았다. 단지 '일'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다. 아마도 그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노동'을 통해 당시 가난한 농부의 삶을 조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속에는 그림을 노동처럼 그려야만 하는 밀레 자신의 삶도 포함되어 있었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찾는 워라벨(일과 인생의 균형잡힌 여유로운 삶)은 꿈도 못꾸었을 그 시절, 사람들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있는 이유일 것이다. 174년 전 고전주의 시대에 그려진 그의 그림이 현대인의 공허한 마음을 치유해주는 유일한 화가라는 점에 그와 우리의 내면은 공감하고 있다.   



이도저도 아닌 주류를 위한 변화, 사실주의라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절대적일 것만 같았던 왕권의 부와 권력이 퇴패, 쇄락하며 프랑스에도 민주주의 화풍의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인상주의 작품 마네의 <풀밭위의 산책>은 당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프랑스 민주주의 상징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현세에 많은 패러디가 일고있을 만큼 상징적인 작품이 되었다. 단지 여성이 육감적이고 낭만적인 육체 미를 위해 그려진 것이 아닌 현실적으로 미화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그러나

절대왕정 태양왕 시대를 거쳐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인상주의에 이르기까지 여성은 결코 우아하지 않았다. 육감적이어야했고 옷을 벗어야했다. 들라크루아의 프랑스 혁명당시의 사진에서 마저도 여성없다. 단지 남성들의 유희놀이 대상이거나, 아니면 바지가 아닌 드레스를 입고 이곳이 유흥업소인지 촛불시위를 벌이는 현장인지 혼선을 주고 있는 벌거벗은 여자가 있을 뿐이다.


 

캔버스 유화, 낭만주의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 루브르 미술관
캔버스 유화, 인상주의,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풀밭위의 점심> (1863) 오르세 미술관



출세의 길 살롱에 그림이 걸리기 위해 시대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는 대신 밀레는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린 최초의 인물이다. 보통사람들의 집단초상화를 그림으로써 고전주의 이상, 낭만주의 공상에 사실주의 현실로 정면 도전했다. 그 뒤를 이은 인물은 귀스타브 쿠르베이다. 쿠르베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야한다고 주장했고, 그의 신념은 <샘에서 목욕하는 여인들> <샘>에서 잘 나타나있다. '사실주의는 본질적으로 민주주의'라 외치며 모든 그림에는 각자의 아름다움이 있다. '제3계급'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자본주의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겠습니다.


브런치는 왜 나의 글을 조명하지 않는가? 밀레와 같은 심정으로 <브런치 사유 속 불편한 질실>에서 속내어린 투정을 한번 부려봤다. 그 뒤로 응원과 울림이 되는 댓글들이 이어졌다.


우주의 기운이 모아져 그 시간 목소리들이 한 곳에 모였다. 주류를 꿈꾸지만 주류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는 의지의 사람들. 시대가 원하는 주류가 아닌 시대가 거부하는 비주류 속에 항상 걸작은 탄생하는 법이다. 브런치 구독자수에 연연해하지만 우리의 글은 계속 쓰겠다는 결심! 오늘 방황의 마지막 장을 내렸다. 시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가 원하는 소설과 시 그리고 에세이를 계속 써내려갈 것이다.


답은 그것이었다. 나의 길을 계속 가다보면 그것이 주류가 된다는 사실.


시대가 원하는 작품은 자본주의의 결과물이요, 시대가 거부한 작품은 민주주의의 산물이다. 오늘 애정하는 히읗 작가님의 글이 올라왔다. 출판사의 많은 거절을 겪은 후 독립출판으로 자신의 책을 발간하셨다. 그 용기있는 행보 뒤에 출판사에서 역으로 출판제의가 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져서 기뻤다. 그런데 오늘 출판사에서 최종 거절의 메일이 왔고, 자본주의 거절을 힘껏 걷어찼다는 글이 올라온 것이다.


브런치는 왜 내글을 조명하지 않는가?
구독자들은 왜 내글에 관심이 없는가?


그 결론을 진샤 작가님이 깔끔하게 정리해주셨다. 브런치에 인기있는 글은 따로 있고, 또 자본주의가 원하는 글은 따로있다고. 맞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그 현실에 낙담하기 보다는 오히려 용기와 열정이 샘솟았다. 그 순간 히읗작가님의 글이 올라온 것이다. 생각의 결이 같은 사람이 많다는 insamnia 작가님의 말이 생각났다. 그 생각의 결이 우주에 닿아 우리를 한 날 한 시에 만나게 해 준 느낌이 들었다. 신기했다. 우주의 기운인지 예술의 영감님이 온 것인지 빠르게 타자기를 두들겼다. 히읗 작가님께 힘내라는 말대신 힘이되는 말을 해주었는데 써놓고 보니 그것은 나에게 하는 외침이기도 했다.  



작가님 글에서 조금은 의연하고 단단해진 모습이 느껴져 저는 좋습니다. 거절 잘 걷어차내셨습니다! 애쓰셨어요~ ^^ 장 프랑수아 밀레도 국가와 권력의 상징을 버리고 누구도 그리지 않던 '농민'을 그렸습니다. 그 뒤를 이은 귀스타브 쿠르베도 고전주의, 낭만주의에 사실주의 현실로 정면 도전했죠. '사실주의는 본질적으로 민주주의다' 전 작가님의 <저는 은행 경비원입니다>가 현대판 자본주의에 도전한 민주주의라 생각합니다.  저는요~ 작가님의 텀블벅과정을 보면서 쿠사마 야요이 설치미술작가가 떠올랐어요. 미술계에선 해마다 비엔나 전시회를 가져요. 전 세계 초대받은 예술가들만이 작품을 걸 수 있는 영광이 주어지죠. 절대 왕정주의 시대 살롱처럼 말이에요. 그런데 쿠사마 야요이는 초대받지도 않았는데 비엔나 전시회 앞에서 자신의 작품을 전시합니다. 그 초대받지 않은 전시를 통해 현존하는 가장 유명한 미술가 반열에 이름을 올립니다. 밀레와 쿠르베에 이어 쿠사마 야요이가 시대가 원하는 그림, 살롱을 거부하고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린 것이 현세에 큰 의미가 있는 것처럼 히읗작가님의 작품도 그러하리라 생각됩니다. 시대가 원하는 주류가 아닌 시대가 거부하는 비주류 속에 항상 걸작은 탄생하는 법이니까요. 그 거절을 당당히 거절할 용기, 시대를 비판한 작품 그것만으로도 이미 그대는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겁니다. 후세에 길이 남을 그 길을 말이죠. 충분히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저에겐 충분히 위대한 밀레십니다!




캔버스 유화, 장 프랑수아 밀레 <만종> (1957~1959) 오르세 미술관
장 프랑수아 밀레 <양치는 소녀와 양떼>
위대한 밀레 작가님들이여,
우리는 우리의 글을 씁시다!
 




https://brunch.co.kr/@sue0105/49



2021년 7월 8일 쓰고

2021년 11월 24일 매듭




출처:

- 일부 글: 장 프랑수아 밀레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 사진: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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