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아닌 일기
1101
우울의 계절이 찾아왔다. 무거운 마음들이 가라앉는다. 유영하던 별들의 자욱이 멍이 든 것처럼 새파래진다. 어떤 것도 어루만져지지 않는다. 식어버린 물 잔처럼, 마른 들국화처럼, 고독한 숨결처럼 부서져갈 뿐.
1102
우리는 그렇게 흐려지고, 무뎌지고, 뭉개지고, 자신을 지워가는 과정, 그 크고 작은 흐름 속에 편승해 있는 승객이겠죠. 오늘도 그 흐리고, 내 영혼의 습기를 잔뜩 머금은 음울한 기차에 올라탑니다. 나는 가는 티켓을 발급받았지만 오는 티켓은 발권하지 않았어요. 아주 먹먹한 마음으로.
1103
내 우울을 매개체로 양분 삼아 버텨낸다. 무럭무럭 잘도 자란다, 그렇게 앓아가면서. 꺾인 꽃들을 무수히 모아 조악한 꽃다발을 만들어냈다. 내가 증명해 내지 못한 색들로 가득해 나는 끝없이 불행해진다.
1104
작은 공중전화 부스에 배꽃을 가득 채워 선물해주고 싶다. 당신이 사실 목련을 좋아하는 것을 알면서도. 가해자 없이 난도질당한 나의 마음은 갈 곳 없이 정처 없이 떠도네.
1105
매끈하게 타오르는 노을의 시선이 퍽 아름다웠다. 구슬 같은 반짝임의 굴곡을 따라 캄캄한 나무의 냄새, 이국에서 맡는 절간의 새벽 공기, 붉게 마른 오렌지의 외로움.
1106
내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아직도 구원과는 멀었군요. 파리하고 투명한 손이 나의 목을 틀어쥔다. 꺾어버리세요, 하고 대답하니 그것은 비틀어진 시간의 틈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그것이 나의 두 번째 절망이 되었다.
1107
날 서있는 공간의 온도가 나를 지극히 불편하게 했다. 세상이 예민한 걸까, 내가 덜그럭거리는 걸까. 나에게는 한 번도 얌전하지 않았는데. 나의 식탁은 불규칙적으로 덜커덕 거리며, 물을 쏟기만 했었는데.
1108
우리는 어디로 떠밀려 가는 걸까
색이 바랜 라일락 한 더미와 함께
우리는 아물지 못했어
내가 꾸던 오랜 꿈들도
아지랑이 흩어지던 겨울밤
눈송이와 함께 폭설에 파묻혀 버렸네
오지 않을 여름을 연모하듯 기다리며
쓰지 못할 편지들을 시린 햇빛에 녹여냈지
1109
이상하고 불온한 날들을 반듯하게 접어요
멀리 꿈처럼 보이는 백야(白夜)의 몸집
나는 오로라를 보러 핀란드로 갈 거야
아스라이 불꽃을 태우며
어리고 몽롱한 지평선을 자장가 삼으며
달고 긴 꿈을 꾸고 일어날 거야
1110
어지러운 봄은 언제 올까
들이키지도 않았는데 요즘 부쩍 재채기가 잦아졌다
불안을 향한 알레르기가 점점 더 심해진다
1111
무거운 비늘들이 작은 돌에 차여 비누향을 냈다
물고기에게서 물의 내음이 나지 않는다면
그건 이미 썩어진 것들이겠지
낚시 바늘에 찢어진 구멍을 아가리에 가지고 지느러미가 찢긴 물에 사는 짐승처럼
털을 빼앗겨 조금은 슬프고도 상냥하게 목장에 누워있는 어린양처럼
나는 작고 부드러워 금방 체해도 이내 순수해진다
게워낼 수 없는 탁한 것들이 나를 기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두서없고 불온한 날들 앞에 고꾸라지며 살아가야겠지
흘러라, 불어라, 휘몰아쳐라
찢어라, 따가워라, 삼켜라
나의 견딜 수 없는 앞날이여
1112
나의 실체는 점점 가벼워지고 문장이었던 날들은 단어의 파편으로 흩어진다. 미천한 존재는 한 없이 무거워 끝없이 상실하는 삶임에도 불구하고 당연한 것들이 없다. 쓸모없음을 강박적으로 부정하며 눈물 잦은 밤들로 가득하지만 이불속의 작은 존재는 갈 곳이 없다.
1113
뿌연 빛을 내는 진주알들이 작은 소반에 담겨 나왔다. 색색이 고운 작은 조각보로 옷을 만들어 입혀도 좋겠다. 먹색으로 물든 술에 나비모양의 옥을 단 노리개도 달아주자꾸나.
1114
나의 도마뱀은 꼬리가 잘렸는데 자라지 않는다. 끊고 도망쳤는데 어째서 나의 앞은 사막 한가운데인지.
1115
슬픈 행복, 저주스러운 축복, 시들어버린 개화, 밝은 어두움, 기쁜 절망, 탄생하는 죽음, 시린 온기,
1116
가자 가자 앞으로 가자
뭍의 날 선 불빛들과 슬픈 영혼들을 끌어안고
슬픈 충동도 눈물의 조각들도
모두 모아 우리가 한아름 가져갈 거야
오늘 밤은 평안이 쏟아지도록
가자 가자 앞으로 가자
커다란 돌림노래를 부르며
가자 가자 앞으로 가자
1117
It's a damn cold night. 그게 네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지. 나는 아직도 그 말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한다. 너는 이유를 말하지도 설명을 하지도 않았지. 간을 초월한 사람처럼 행복해 보이기도 했고, 모든 걸 절망한 사람처럼 허탈해 보이기도 했어. 하지만 한 가지 명확한 것은 너에게서 이내 긴 여행을 떠날 것 같은 의지가 느껴졌지. 마치 거부할 수 없는 길을 따라나선 순례자처럼 말이야. 나는 너를 붙잡아야 했을까?
1118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을 알아,
하지만 사랑하는 방법은 알 수 없어.
이 세상에서 우리들은 그저 방황하는 안개,
실존의 연유를 찾으러 떠도는 방랑자니까.
세상은 선명하고 선명함 사이의 나는 아득해.
가끔은 들쭉날쭉한 바람을 따라 그저 떠돌기만 하지.
우리는 이 커다란 세계에서 어떠한 명확함을 찾아야 하는 걸까? 그저 세상을 어지럽게 만드는 게 아닐까?
1119
푸른 안개에 늘 푸른 떨기나무 한 큰 술, 나른한 봄의 사과빛 뺨을 세 파우더, 뱁새의 날개 안 쪽 흰 깃털 한 개, 마지막으로 파도의 꿈을 섞어 새로운 침구를 만들어 주세요.
1120
김 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 우리는 점점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라는 말을 뼈저리게 느끼는 요즘. 어떻게 되어도 존재의 이유를 끊임없이 증명해야만 의미를 갖는 상관없을 뿐인 날들만이 가득해 보인다.
1121
요즘에는 작품 전체가 아닌 파편을 보려고 하는 편이다. 가지고 있는 분위기와 재질 같은 것들. 연작이라면, 어떠한 관계성을 가지고 있는지 따위에 관한 것들. 따로 두어도 같은 길을 가는 것들. 일정한 감각과 오묘한 균형의 선상.
1122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 ABC
A, 나 빼고 전부가 평화로워 보여서 구역질이 나는 기분을 아니? 나는 어떻게든 꺼지지 않기 위해 지면으로 올라오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다들 너무 잘 살고 있잖아. B,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를 자석처럼 끌어들여.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는 것처럼 말이야. 세상의 모든 것들이 너무 위험해. 길을 가다가 자주 강과 마주치고, 높은 빌딩에 올라가고, 도로의 차들을 만나니까. 잠시라도 한 눈을 팔면 죽기 십상이야. 나도 홀린 듯 이끌려 떨어질 것 같거든. 그러니 항상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 C, 지루한 것들이 죽을 생각을 하지 않아. 재미있는 것들은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지. 외계인이 우주선을 이끌고 지구에 정차해도 지루해서 다시 돌아갈 만큼 말이야. 그렇게나 재미가 없는데 남은 날들이 까마득한 거야! 이런! 그러니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거야. 태어나서부터는 소멸하기 위한 준비를 하지.
1123
다, 다, 다, 전부, 전부, 전부, 잃어버린 거야. 아주 먼 옛날, 내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그때. 그런데 지금 알아버린 거지, 그 부재를. 실종, 결핍, 분실, 상실, 뭐라고 불러야 할까? 어떤 단어를 선택해도 적절하지 않은 기분이 든다.
1124
누군가 나에게 컴컴한 가루를 뿌려 출구가 없는 어둠 자루에 집어넣어 버렸지 뭐야. 자루가 이리저리 흔들리길래 멀미 나요! 그만 휘저으세요! 하고 조그맣게 말했는데 아무도 못 들은 거겠지? 아, 다시 잠잠해졌다. 하지만 다시 곧 요란스러워져서 멀미할 것 같으니 미리 눈을 감고 있을까 해. 미래를 기약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 나가게 되면 다시 연락 줄게,
D로부터.
1125
그만 죽으려고, 사랑이 없는 세상에서
1126
잠에 들기 위해 고요히 입을 다물었다
오고 있던 아침은 창문을 빗겨나갔고
나는 숨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소리를 죽였다
작은 심장박동 소리가 달팽이관을 타고
빙글빙글 춤을 추었다
1127
나는 사라질 것이다
윤색(潤色) 된 인생을 저버리고
벼락 맞을 세상을 향해 고함치고 나서
이내 습기가 가득한 욕실의 커튼으로부터
밖으로 난 창을 향해서
1128
나는 이제 술레를 그만하고 싶다
깜깜한 방에서 내 뒷모습을 찾아내
목덜미를 잡아채려 하는 일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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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리한 말들을 피하기가 어려워
나는 그 고장 난 카세트테이프에 갇혀
같은 구간을 반복하고는 해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는 일이 잦아졌어
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