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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콜럼버스 Dec 19. 2021

일본 반도체, 미국 꺾고도 왜 한국·대만에 밀렸나(1)

1986년 일본 반도체 업계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니혼전기주식회사(NEC)가 세계 메모리 반도체 부문 절대 강자인 미국의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를 꺾고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해서다. 도시바·히타치까지 TI를 제쳤다. 이런 가운데 인텔이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포기하며 일본의 세계 반도체 시장점유율은 절반을 넘었다.



때마침 VTR·가정용 게임기 등 가전제품 보급이 크게 늘며 세계 무대에서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승승장구했다. 1987년 세계 반도체 10대 기업 중 NEC·도시바·히타치(1~3위)·후지쓰·(6위)·미츠비시(9위) 등 일본 기업 5곳이 이름을 올리며 시장을 휩쓸었다. 당시 일본 반도체 업계는 ‘재팬 이즈 넘버원’이란 말을 공공연하게 썼다.





영광의 순간은 짧았다. 1993년 다시 미국에 시장점유율 1위를 빼앗겼고, 1992년엔 신생 삼성전자에 D램 분야 1위를 내줬다. 1990년대 가전 시장 변화와 2000년대 치킨게임에 대응하지 못하며 일본 기업들은 반도체 시장에서 사실상 자취를 감췄다.



현재 세계 10대 반도체 기업(매출 기준) 중 일본 기업은 9위의 키옥시아(전 도시바)가 유일하다. 산업 환경 변화와 일본 반도체 기업에 대한 미국의 견제, 엔고에 따른 수출 경쟁력 약화, 한국·대만의 추격 등 요인 등이 맞물려 순식간에 추락하고 말았다.



1970~80년대는 일본 반도체 기업의 천국과도 같았다. 당시 전체 반도체의 중추였던 D램 시장은 날로 성장했다. 세계 경제의 고도성장 속에 계산기·TV·게임기 같은 생활가전 판매량이 급증했고, 가전제품의 소형화, VTR·CD플레이어 등의 등장이 D램 수요를 이끌었다.






이런 가운데 PC·팩스 등 사무자동화(OA), 프로그래머블 컨트롤러 등 공장자동화(FA)가 가속화했고, 디지털교환기·종합정보통신망(ISDN) 보급 등 인프라 영역에서도 D램 수요가 커졌다. 반도체 수요가 증가하는 가운데 일본은 미국에 앞서 대규모 설비를 증설하며 당시 핵심 제품이었던 64K부터 4M까지 D램 시장의 헤게모니를 쥐었다.



일본 반도체 산업의 추락은 미국 정부의 강한 견제에서 시작됐다. 가장 상징적 사건은 1986년 체결한 ‘미·일 반도체 협정’이다. 1980년대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와 인텔·마이크론 등은 일본 반도체 기업들의 부상을 가로막기 위해 잇달아 덤핑 혐의로 제소했다.



이에 미·일 정부가 중재에 나서며 결국 일본의 미국 반도체 수입 확대·덤핑 판매 금지 등의 내용을 담은 비대칭 협정을 체결했다. 미국은 일본 반도체 산업을 가격할 강력한 명분을 쥐게 됐다. 실제 협청 체결 이후로도 미국은 일본이 협정 이행을 게을리한다고 판단하고 '수퍼 301조'를 동원해 일본의 발목을 잡았다. 미국은 이 사이 반도체공동개발기구(SEMATEC)·반도체연구협회(SRC) 등을 설립해 산업 경쟁력 강화에 나섰다.




일본을 향한 미국의 공세가 거세던 1990년대 들어 세계 반도체 시장은 격변기를 맞았다. 가정용 PC 보급이 늘어난 가운데 마이크로소프트(MS)의 윈도 새 버전이 나올 때마다 PC 교체 수요가 발생했다. 이 수요는 대개 인텔 중심의 미국 시스템 반도체 기업들이 독차지했다. PC 교체 수요가 빨라지자 일본에 비해 가격이 저렴한 한국산 D램 판매가 급증했다.



당시 삼성전자·현대반도체 등은 D램 성능과 더불어 수율 중심의 가격·생산성 향상 정책으로 일본을 앞서기 시작했다. 미국의 눈치를 보던 일본은 시스템 반도체 시장의 급성장과 한국의 D램 시장 영향력 확대 속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일본의 부진 속에 미·일 반도체 협정도 1996년 종결됐다. 반도체 패권을 다시 되찾은 미국으로선 더 이상 연장할 필요가 없던 셈이다.




https://www.wsj.com/articles/in-trade-fight-china-today-differs-from-1980s-japan-1523202722




위기에 몰린 일본은 1995년 통산성을 중심으로 시작된 산학 연계 프로젝트를 개시했다. 1996년에 일본 내 반도체 연계 합병기업인 ‘반도체 첨단 테크놀로지(Selete : 셀레트)’를 출범시켰다. 1976년에 시작한 관민합동 프로젝트 ‘초(超) LSI기술연구조합’의 성공 경험을 다시 살리기 위해서다. 복수의 회사가 공동 기술을 개발함으로써 반도체 뿐만 아니라 설비·장비 등 산업 전체에 헤게모니를 쥐는 방법이다. 셀레트에서는 직경 300mm의 차세대 반도체 웨이퍼를 사용한 생산기술 개발을 진행했다.



이 프로젝트에는 일본 업체 10곳과 삼성전자를 포함해 총 11사로 결정됐다. 반도체 기술 도입에 박차를 가하던 삼성전자는 도시바, NEC와의 인연으로 여기에 참여했다. 그 결과 삼성전자는 세계 최초로 300mm로 D램 양산에 성공했다. 삼성전자가 성과를 내고 2년 뒤 엘피다, 순차적으로 히타치·NEC·도시바·후지쯔는 등이 300mm 반도체 공장을 건설했다. 일본은 각 기업이 뭉쳐 대규모 300mm 공장을 건설할 계획이었으나, 히타치·르네사스·NEC 등의 이해관계가 갈리며 각각 별도의 공장을 건설하게 됐다. 파운드리 생태계에서 우군을 확대해나가던 TSMC에 당할 수 없었다.



이런 가운데 1990년대 후반 D램 공급 과잉은 일본 반도체 기업에 재앙이었다. 실적 부진이 이어으로 일본 기업이 하나둘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D램 시장에서 후지쓰가 1999년 철수한 데 이어 NEC·히타치는 사업부를 분사해 엘피다메모리로 통합했고, 도시바는 2001년 물러났다.



64M D램 개발의 주역들권오현 삼성전자 회장(가운데)과 전동수 삼성전자 사장(오른쪽에서 두번째). 출처: 삼성전자


https://www.samsungsemiconstory.com/kr/%EB%B0%98%EB%8F%84%EC%B2%B4-%EC%97%AD%EC%82%AC%EC%97%90-%ED%9A%8D%EC%9D%84-%EA%B7%B8%EC%9D%80-64m-d%EB%9E%A8-%EA%B5%AD%EA%B0%80%EC%A4%91%EC%9A%94%EA%B3%BC%ED%95%99%EA%B8%B0%EC%88%A0/



그러자 일본 반도체 회사들은 이익이 크지 않은 D램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과 같은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이에 정부 주도로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 구축 계획을 2012년 목표로 세웠다. 실제 2003년 히타치·미츠비시가 시스템 반도체 부문을 분리, 합작해 르네사스를 설립했다. 르네사스를 중심에 두고 NEC일레트로닉스·후지츠·파나소닉을 합병시켜 시스템LSI 사업을 통합하는 방안을 진행했다. 더불어 1990년대 대만 TSMC가 보편화한 팹리스·파운드리의 수평 분업 모델도 도입키로 했다.



그러나 이미 세계적으로 인텔·자일링스·알테라·퀄컴 등 미국 팹리스 회사와 대만 TSMC 간에 공고한 협업 체계가 갖춰졌다. 메모리 부문은 삼성전자가 대거 투자한 회로 집적화에 성공하며 글로벌 시장을 휘어잡기 시작했다. 2005~07년 설비투자 금액은 삼성전자 8210억 엔으로 글로벌 반도체 기업 중 가장 많았다. 같은 기간 인텔 6430억엔, 하이닉스 3650억엔, TSMC 3314억엔 등인 데 비해 도시바는 3250억엔, 소니 1467억엔에 그쳤다.





일본은 정부 주도 산업 재편과 오너십 부재 속에 설비 투자와 사업 확장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나마 일본은 1990년대까지 디자인·개발·웨이퍼 제조·테스트·판매 등 모든 사업을 한 회사가 자체 완결하는 방식을 고수한 것이 소재·부품·장비 분야의 경쟁력을 지킨 원동력이 됐다.



히타치에서 40여 년간 반도체 연구를 한 츠기오 마키모토(牧本次生) 전 엘피다 이사는 그의 책 『국가의 성쇠는 반도체에 달렸다』에서 “1976년 일본의 수퍼 LSI 프로젝트가 미국으로부터 민관 유착이란 비판을 받은 후로 민관 연계 프로젝트가 진행되지 않았다”며 “이후 미국이 세마텍을 설립했듯 일본과 같은 반도체 프로젝트는 국가의 가장 중요한 전략 분야로 평가받았다”고 설명했다.




이대로 몰락할 일본이 아니었다. 반전의 카드를 준비했다. 2012년 2월에 히타치제작소·미츠비시전기·NEC가 출자해 출범한 르네사스 일렉트로닉스와 후지츠, 파나소닉 등 3개 회사는 시스템LSI사업 통합을 위한


협의를 진행했다. 일본 반도체기업의 특징으로 간주되던 설계·개발에서부터 생산까지의 모든 공정을 수행하는 수직통합모델에서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었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을 전후해 르네사스 일렉트로닉스 등 일본 반도체 업계 전체의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도시바는 브라질에 반도체설계 합작회사를 설립하는 한편 SK하이닉스와 차세대 메모리의 기술개발을 추진했다. 반도체사업 구조개혁의 일환으로 일본 국내 제조거점의 재편과 집약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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