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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연 Aug 27. 2024

미다졸람의 날





미다졸람이 들어가는 날이다. 그렇기에 시술에는 꼭 보호자를 동반해야 한다. 보호자가 없어도 됐던 시기도 있었으나, 여러 위험 때문에 꼭 보호자가 동행하는 것으로 병원의 정책이 바뀐 후 나는 참 곤란해졌다. 두들 출근하는 평일 오전, 대체 누가 대학병원시술에 따라와 줄 수 있단 말인가.


오늘도 보호자는 없다. 이따 끝날 때쯤에 친구가 올 거예요,라고 얘기했더니 보호자가 와서 같이 가는 모습을 꼭 보셔야겠다는 간호사 선생님. 어... 음... 전철역으로 두 정거장 거리 정도에 사는 친구가 있긴 하다. 그래서 그 친구가 올 거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그럼 번호를 달란다. 맙소사. 번호를 알려드리고 친구에게 상황설명을 했다. 오는 중이라고 거짓말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오늘은 일정이 있어서 불가능하지만 다음에는 꼭 보호자 역할을 해주겠다는 친구 Y. 그럼 다음에는 꼭 부탁하겠다고, 시술 끝나고 맛난 거 대접하겠다고 했더니 아주 좋아했다.


시술은 받아야 하고, 가족들 중 그 누구도 보호자 역할을 해주지 못하는 상황이어서 시술 자체를 받지 못할 뻔한 적이 (여러 번) 있다. 마침 인공신장실에서 투석을 하는 중에 시술 예약 전화를 하고 있던 터라 간호사 M 선생님이 오며 가며 나의 곤란한 상황을 눈치챈 듯했다. 그때는 어찌어찌 엄마가 시간을 내어 같이 가주었지만, 보호자가 꼭 있어야 하는 상황은 내게 늘 너무 곤란했다. 그로부터 2주가 흘렀을까. M 선생님이 휴게실에 있던 내게 은밀히 다가왔다. "시술은 어떻게 하셨어요? 제가 같이 가드리려고 정연님한테 말씀드리려 했는데 그날 바로 가고 안 계시더라고요."

앗, 그러셨구나. 저 엄마가 시간을 내서 같이 다녀왔어요. "혹시 다음에 또 그런 일 있으면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 제가 같이 가드릴게요."


정말 놀랐다. 당시 M 선생님은 임신 20주쯤 되었을까? 어쨌든 임산부인 데다, 내가 다니는 대학병원은 우리 P시에서 왕복 4시간이 걸리는데 나와 동행해 주겠다니. 게다가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환자인 내게 저렇게까지 마음을 써 주다니 그 감동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다.

나는 내가 혼자 길에서 쓰러질지언정, 남에게 폐 끼치는 것은 극도로 꺼리기 때문에 부탁을 한 적은 없지만, M 선생님은 지금까지도 내게 호의를 보여준다. 여름의 언제는 식사 데이트 신청을 내게 하기도 했다. 그리고 곧 그녀는 퇴사를 한다. 아마 우리는 곧 첫 데이트를 하게 될 것이다.


해리언니. 해리언니는 의료 파업 같은 일이 일어나면 늘 내 걱정을 해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오늘 시술에 대해 이야기하니, 자신에게 얘기하지 그랬냐고 하는 언니의 말에 깜짝 놀랐다. "지금이라도 내가 갈까?" 하는데 정말 눈물 날 뻔했다.

언니도 여기서 전철로 15분 거리에 살고 있으니까, 엄청난 폐를 끼치는 것까지는 아닐 터. 그럼에도 나는 가족들에게도 부탁하지 못하는 보호자 역할을 친구에게 하기가 늘 꺼려다. 그런데 선뜻 먼저 와 주겠다고 하는 언니에게 다음에는 꼭 보호자 역할 해주시라고, 우리 시술 끝나고 데이트까지 하면 되겠다고 했더니 웃으며 좋아해 주셨다.


바로 옆 동네에 살고 있는 78세의 친구 재옥도 만약 내가 부탁만 하면 언제든 병원으로 달려와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보호자로 동행해 줄 것을 부탁하지 못했다. 그들도 각자 스케줄이 있을 텐데, 나의 보호자 역할을 해달라는 것이 너무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정도의 역할을 부탁할 자격이, 관계성이 우리 사이에 있을까 늘 고민다. 나를 위해 타인의 시간을 몇 시간이나 잡아먹는다는 것을 편히 받아들일 수 없다. 내가 시술받는 시간 동안 낯선 대학병원 안에서 불편하게 나를 기다리게 하는 것이 나로서는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러나 나를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주려는 친구들이 이토록 많다. 서울에 친구라고는 없었는데, 이제 내게도 좋은 친구들이 꽤나 많이 생겼다.


무엇보다도 오늘 혼자 병원에 가는 것을 정남이 무척이나 걱정했다. 정남에게 조금 어리광을 부렸더니, 다음 시술에는 2주 전에 미리 알려줄 수 있느냐고 한다. 반드시 연차를 써서 동행해 주겠다고.

이제 스스로 보호자 시대는 끝이다. 혼자 살 수 없는 인생. 곁에 있는 속 깊은 친구들에게 더욱 잘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경의선은 서강대역을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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