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6년 차, 프리랜서 8년 차. 중간에 두 아이를 출산하고 드문드문 끊겨 버린 경력을 이어 나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같은 선상에서 출발했더라도 물 한번 마시니 이미 내 앞에 100m만큼 가 있던 동료들을 기억한다. 당시 한 달 내 일을 할 수 없어 첫째를 낳고 복직하며 파트타임처럼 강사 일을 근근이 이어가는 나에게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지 설교했던 강사도 기억한다.
나는 달리다 또 쉬어야만 했다. 두 번째 물을 들이 켰을 때, 200m를 앞지른 강사도 있었고, 이미 경로를 이탈해서 다른 곳을 향해 달리던 사람도 생겼다. 결승선도 안 보이는 이 무한대의 마라톤 선상 위에서 초반에 나는 달려야 했다. 어떻게든 차이를 좁히고 싶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했고, 원하지 않는 강의를 받아야만 했다. 속으로 NO를 단호하게 외쳤지만, 현실 앞에선 그럴 수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독했는지 모른다. 둘째가 갓 100일이 넘었을 무렵부터 아주 뻔뻔하게 지방에 사시는 시어머님에게 SOS를 청했다. 일을 해야만 삶이 유지된다는 아들의 말 때문인지 어머님은 흔쾌히 올라오셨고, 안 그래도 좁은 우리 집의 방 한 칸을 차지하게 되며 우리의 동거도 시작되었다. 고부간의 사이가 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그 사이에 피 튀기는 경계와 눈치게임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자존심이 센 편인 나는 어머님한테 미안한 이야기를 하기 싫어서 굳이 짊어지지 않아도 될 무게를 견뎌내고 있었다. 반대의 어머님도 이 부분은 마찬가지리라 생각한다.
커리어 욕심으로 시작된 대학원 라이프는 2020년에 코 시국과 함께 시작되었다. 말인즉슨 밥 줄이 끊기면서 동시에 학업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힘든 순간이 짜증이 났다. 강의가 없을 땐 적극적으로 아르바이트를 구해서 일을 하기도 했다. 주변에서 대단하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그 대단함이 과연 경외심인지 연민인지 나는 알 길이 없다. 그 와중에도 억척스러운 아내 때문에 남편이 혹시나 무능력해 보일까 봐 머저리처럼 걱정했던 나날도 떠오른다.
복직한지는 3년 차, 코시국은 1년 반이 지났다. 강사 생활이 안정된 건 20년 하반기부터, 마음을 고쳐 먹으면서 내 살길을 찾을지는 9개월쯤 되었다. 요즘 들어 부쩍 얼굴은 좋아 보이는데 눈은 피곤해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동시에 그걸 어떻게 다 하고 있냐는 칭찬도 듣는다. 이 칭찬은 코시국에 알바를 할 때 듣던 그것과는 매우 다른 결이다. 사람이 얼마나 독하고 안쓰러워 보였을까? 눈은 피곤한데 어떻게든 살려고 애쓰는 모습이. 같이 아이를 키우는 프리랜서 강사님들의 놀라는 눈빛을 볼 때면 한편으론 마음이 편치 않을 때도 있다.
나의 작은 행동 하나가 주변에 끼칠 영향에 대해 항상 생각하며 산다. 같은 선상에서, 어려운 환경에서 이를 악 물며 내 살길을 어떻게든 찾아가는 이 집념이 누군가에게 또 다른 역할 코르셋이 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물론 엄마로서,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강사로서의 복합적인 삶을 다소 어설프지만 해내가는 나 자신이 기특하다. 항상 나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면서도 역할 나열에서 나의 직업은 늘 말미에 있지만, 어쨌든 나는 한 계단씩 오르고 있다.
결혼이 여성에게 불리하다는 것은 기혼, 미혼 모두 아는 사실일 것이다. 사람은 각각 다른 모양이 있다. 그 불합리한 제도 속에서 환경을 거부하고 살아가는 것은, 누군가에겐 삶의 도전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겐 넘을 수 없는 장애가 되기도 한다. 나는 그 출발에서 조금 유리한 성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에너지가 심하게 밖으로 돌기 때문이고 나의 꿈을 응원해 주는 가족들 때문이다. 바람은 한 가지다. 이런 내 모습이, 결혼이 장애가 되는 여성에게 또 다른 역할 코르셋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글을 끝내려니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내가 빨리 더 커서 그런 여성들을 돕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무모한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