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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 기획자 Jul 29. 2024

논문 쓰다 말고 한식조리기능사 필기시험을 본 이유

무조건 작은 성공이 필요해 


육아휴직기간, 꽤나 설레었던 시간이 있었다. 하나는 저녁 2시간 동안 공부하는 정리수납 자격증 2급 과정과 다른 하나는 한식조리사 과정이다. 


나는 정리와 요리와는 담을 쌓은 사람이다. 변명을 하자면 학창 시절 요리를 할 시간에 책을 봐서 성적을 올리는 일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청소대신 밖에 나가 책을 읽으며 어질러진 방을 회피하였다. 박사 논문을 쓰면서 우리 집 서재는 혼돈의 세계로 빠졌다. 남편은 이렇게 지저분한 방 안에 너만의 세계가 있는 것이 참 신기하다고 혀를 끌끌 찼다. 서재에는 책이 너무너무 많아서 이삿짐센터 아저씨들도 기피하는 방이 될 정도였다. 짐은 많은데 난 정리와는 거리가 멀어 늘 너저분하고 정신이 없었다. 마침 동네 문화센터에서 정리를 알려주는 강의가 있었고, 짬을 내어 등록하였다. 


정리 외에 한 가지 더 문젯거리가 있었는데 바로 요리였다. 정리는 머리만 어지러운걸로 끝나지만 요리는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요리 대신 공부이지! 를 외치다가 위장에 탈이 나면서 슬슬 요리를 해볼까 생각을 했다. 언제나 배달의 민족 VIP를 유지했던 나였지만, 쌓여가는 일회용기에 몸과 마음이 지치기도 했다. 


수개월간 배달의 민족 vip를 유지하였으면, 이쯤 해서 멀어질 필요도 있겠다 싶었다. 아기를 키우면서 가장 내게 큰 위안을 주었던 게 배달의 민족이었지만,... 가계 지출도 컸고, 위가 쓰릴 때가 있었다. 고민을 하다 주말에 3시간 정도 짬을 내서 요리를 배워보기로 했다. 주변에서는 "논문 쓰는 것도 시간이 모자란데 웬 요리니?"라고 내 상황에 우려를 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내가 좋아하고 관심 있는데 시간을 쓰지 않으면 더 마음이 답답해질 것 같았다. 지금 이 시기에 '요리'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모험이었지만, 일주일에 한 번의 조그만 일탈이 소소한 재미를 전해 주었다. 


성취감을 느끼기 위해 '한식조리기능사'부터 시작을 하였고 필기시험을 바로 등록하였다. 한식조리기능사 시험은 문제은행식으로 출제되기에 두꺼운 문제집을 열심히 풀면서 이론을 익히면 충분했다. 비타민 종류, 각종 효소 종류 등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용어를 보고, 익히는 과정이 낯설었지만 재미있었다. 확실히 난 논문을 쓰는데 심적으로 많이 지쳐있어 전혀 다른 분야를 공부하는 게 흥미로웠다. 


무조건 작은 성공이 필요하구나


논문을 읽다가 지칠 때 즈음 뜬금없이 한식조리사 필기 공부를 하였다. 한식조리사는 내가 여태 공부했던 것들과 결이 많이 달라 신선했다. 그래도 당장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초심자의 행복이란 모든 지식이 신선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새로운 분야의 지식을 외우고, 문제집을 열심히 풀면서 단시간 내 아슬아슬하게 한식조리기능사 필기를 통과하였다. 육아휴직 기간에 얻은 성취감에 기분이 좋았다. 내친김에 양식, 일식, 중식 자격증까지 도전하였다. 모두 내용은 비슷하였기 때문이다. 


기분이 좋으니 이 기세로 다시 논문을 평소보다 몇 페이지 이상 더 써내려 갈 수 있었다. 지난주 토요일에는 교수님과 미팅을 하였는데, 무사히 디펜스를 할 수 있었다. 평소라면 교수님의 질문에 당황을 하면서 쭈그리 모드가 되었을 텐데, 이번에는 내 생각을 덧붙여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이 자신감의 원천이 뜬금없이 '한식조리기능사'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일상의 작은 성취는 분명 무언가 시작하고,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는 건 사실이다. 



육아를 하면서 공부를 하는 상황에서는 두 가지 마음이 들 공존한다. 마음속 한구석에는 '이 바보야! 네가 지금 한식조리기능사를 공부할 때냐.!'라고 소리치지만 다른 마음 한구석에는 '지쳤을 땐, 그냥 네가 하고 싶은 거를 해. 지금 당장 즐거운 것을 찾아.'라는 마음이 공존하게 된다. 아기를 돌보지 않고 공부를 한다는 건 그 자체로 죄책감이 생긴다. 그것도 당장 졸업과 상관없는 다른 분야의 공부를 하는 건 특히나 더 죄책감이 생긴다. 하지만 이로 인해 원동력이 생길 수 있다면, 이 즐거움으로 고통마저 녹일 수 있다면 잠시 일탈을 해볼 만하다. 


수도승처럼 공부에 집중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좀처럼 효율이 생기지 않을 때는 사소한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이벤트를 자꾸 만들어 추진력을 얻는 것도 방법이다. 물론 사소한 성취감을 얻으려 했던 이벤트에 지나칠 정도로 에너지와 시간을 쏟으면 문제가 되겠지만, 잠깐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라면 기분 좋은 성취감을 얻을 수 있다. 


육아를 하며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작은 성취감이 필요하다. 이건 돈으로 살 수도 없고, 누가 대신 해줄 수도 없기에 스스로 만족할만한 것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요즘 세대의 엄마아빠가 어떤 세대들인가. 교육에 민감한 부모님의 품 안에서 조금 더 나은 성적을 얻고, 성취를 느끼고 자기 효능감을 느끼며 살아온 세대가 아닌가. 나를 보내고 엄마를 마주하는 시간을 유연하게, 기분 좋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를 위한 성취감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즐거움이 있는 곳을 찾기 위해, 사소한 성취감을 얻기 위해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육아로 지칠 때면, 오늘도 나를 위해 성취할 것은 없을지 고민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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