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열정(아니 에르노)
사랑할 때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에 대해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도파민, 아드레날린, 옥시토신, 세로토닌. 다분히 전문적이게 들리는 이 의학용어는 왜 우리에게 익숙할까. 그건 무엇보다 사랑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신체 기관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크게 의문을 품지 않고 살아가지만 아드레날린, 교감신경 이런 건 빠삭할 만큼 사랑에 진심이다. 과학적으로 이해한다고 해서 사랑에 능통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랑할 때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책 <단순한 열정>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아니 에르노에 대한 기록이다. 유부남인 러시아 외교관과 사랑에 빠진 아니 에르노는 스스로가 어떻게 소진되어갔는지 그 과정을 보여준다. 여기에 소멸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충만함도, 쇠잔함도, 비참함도 다 존재한다.
나는 도로가 막히거나 은행 창구가 붐벼도 조용히 기다렸고, 직원들이 불친절해도 화를 내지 않았다. 어떤 일에도 초조해하지 않았다. 또 나는 사람들에 대하여 연민과 고통과 우정이 뒤섞인 묘한 감정을 느꼈다. 일없이 공원 벤치에 누워 있는 사람들, 창녀촌을 단골로 드나드는 사람들, 그리고 통속소설에 정신이 빠져 있는 여자들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그렇지만 내 안의 무엇이 그 사람들과 닮았는지는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었다.)
단순한 열정 26p, 아니 에르노
사랑의 충만함이란 대단하다. 이건 한 사람의 관점을 아예 바꿔놓는 일이다. 사랑할 때 우리는, 스스로 낯설게 느껴질 만큼 생경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이해할 수 없던 표정과 감정을 이해하게 되고, 사랑과 관련 없어 보이는 일에 대해서도 어떤 태도를 형성한다. 아니 에르노는 이 충만함을 통해 자신의 과거 계급에 대한 새로운 연결성을 가졌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녀는 노동자 계급 부모님 밑에서 자라 엘리트 사회 진입에 성공했다. 계급 상승의 궤적은 그녀의 일생을 따라다니며 풀어야 할 숙제 같은 것으로 남는데, <단순한 열정>에서도 이런 흐름이 나타난다. 통속 소설, 노숙자(혹은 실직자), 성매매. 그녀는 노동 계급 혹은 사회의 아래에 위치한 사람들에 대해 일말의 인류애를 가진 듯 느껴진다. 그녀는 '무엇이 그 사람들과 닮았는지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었다'라고 했지만, 우리 모두가 느끼는 고통의 모양이 바로 그 닮은 점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여러 가지 제약이 바로 기다림과 욕망의 근원이었다. 그 사람은 항상 공중전화로 내게 전화를 했는데, 공중전화에 고장이 잦아 수화기를 들어도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오래지 않아 나는 벙어리 전화가 걸려오고 나서 15분쯤 지나면 틀림없이 그 사람의 전화가 다시 걸려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단순한 열정 36p, 아니 에르노
작가는 욕망이 작동하는 방식을 정확히 이해했다. 자신의 열정에 환상을 씌우는 대신 그걸 벗겨내는 쪽을 택했다. 이런 지점에서 그녀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의 욕망이 증폭되는 과정을 객관적으로 지켜보는 일. 욕망이 강렬할수록 스스로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 있는 일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아니 에르노는 스스로에게 한 걸음 정도의 거리는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환상을 벗겨내는 일은 열정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일이므로 그 '단순함'을 알아낼 수 있는 길이다. 이게 아마 '단순한 열정'을 책 제목으로 정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책을 읽다 보면 그녀가 스스로를 정당화해야 한다는 기분을 느낀 것처럼 생각되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찾아보니 당시 저작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분위기였나 보다. 자전적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의 문제도 그렇거니와 작가의 서술 태도가 퇴행적이라는 의견이 있었다. 관련 내용은 책 말미에 붙은 해설에도 등장한다.
심리분석과 윤리적 정당화를 꾀하지 않고 내면적 욕망을 드러내고 나열하기만 하겠다는 저자의 의도 표명은 오히려 작품의 진정성을 훼손했고 연인의 언어, 취향, 행동 방식을 오로지 외국인이란 예외적 지위로 돌려버림으로써 마치 판단 정지를 정당화하는 화자의 태도는 이전에 탄탄하게 구축했던 자신의 문학관마저 부정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평가했다.
단순한 열정 92p, 아니 에르노
과거의 단순한 열정을 회환의 어조로 서술하지 않았다는 것이 비판받을 지점인지는 의문이다. 더군다나 연인이 외국인이란 사실을 이용해 작가가 판단을 정지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판단을 정지시킨 것이 아니라 그 모양 자체를 바꿨다는 게 더 맞는 말 같다. 그녀가 어떤 요소들을 기준으로 연인을 해제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꼭 외국인이라는 정체성 때문이 아니다. 되려 그녀가 가진 요소(기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외국인이란 사실은 많은 것을 '근거 없이' 이해하도록 만든다. 너무나 다른 환경, 생김새, 말투, 관습 이 모든 것을 직접 몸으로 겪고 나면 판단이 진화한다. 진화한 포켓몬이 아예 다른 생김새를 가지듯 판단의 모양도 변해버린다. 그냥 그렇게 살아온 애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사랑에 빠진 여자의 눈으로 책을 읽었지만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들은 있다. 애인이 유부남이라는 사실과 둘의 사랑이란 것이 육체로밖에 환원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인간은 언제나 취약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그것들이다. 자유연애니 다자연애니 하는 개념은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여태껏 배타적 독점 연애만 경험해본 사람으로는 폴리아모리가 와닿진 않는다. 그렇다보니 <단순한 열정>과 같은 종류의 사랑을 보면 마음 한편에 불편함이 생긴다. 더구나 이 열정은 육체 중심이다. 애인을 맞기 위해 집을 정리하고 몸을 치장하는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이것이 일상을 압도하면 건강하지 못하단 느낌을 준다. (그런 느낌을 줄 뿐, 건강하지 않다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누구나 이런 압도를 당해본적 있기 때문이다) 데이트의 마지막은 항상 남자가 문을 열고 나가는 그 순간인 것으로 고정된 관계. 그녀의 자괴감으로 문이 도배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쾌락의 가치가 높아진 지금 같은 시대에 이런 유형의 만남은 존재한다. 하지만 난 확신한다.육체적 연결만큼 우리가 또 원하는 것은 일상의 연결이라는 사실을. 또 이것이 삶에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단 사실을.
이성애자로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지 5년이 넘어가는 나에게 사랑이란 건 이제 좀 생경하다. 그래도 사랑이란 단어를 보면 스무 살의 연애가 생각나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시 한 편이 떠오른다. 아니 에르노는 푸른 눈의 애인을 환대 했고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 아주 특별한 일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 시를 알았으면 좋겠단 생각이 든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방문객, 정현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