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M CONCERT를 발견하다
군대를 제대하고 나는 문화생활에 미쳐보고 싶었다. 2년의 고생을 보상받고 싶어서였을까. 좌우산 우물통이란 복학생 표 노스페이스 배낭 대신, 인라인스케이트 플라스틱 가방에 큰 헤드폰을 끼고 다녔다. 재즈힙합, R&B 소울, 얼터너티브 팝 등을 들으며 흥얼거렸다. 싸이월드의 검은 소울이란 클럽을 매일 밤 들어가며 이름도 모르는 뮤지션들의 노래를 듣고 mp3 파일을 찾아들었다. 당시 내 MP3 플레이어에 저장된 음악만 300곡이 넘었다. 그 300곡을 1년 동안 슬프고 설레고 우울하고 기쁠 때마다 지겹도록 들었다. 작은 MP3 공간 속은 나의 은신처이자 휴식처였다.
비 오는 여름날. 24살의 난 홍대에 있었다. 당시 사운드데이란 월 1회 이벤트가 있었는데 20,000원을 내면 홍대 모든 라이브클럽에서 모든 인디신들을 만날 수 있었다. 사실 그날의 뮤지션 리스트는 몰랐다. 비 오는 홍대 거리를 무작정 걷다가 지하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가 마음에 들면, 내려가서 듣는 식이었다. 서늘한 빗줄기를 피해 들어가면 지하 공간은 습한 땀 내음이 났고 사람들의 체온이 한껏 농후한 열기를 만들어냈다. 담담하게 고백을 하는 듯한 어쿠스틱 솔로 공연은 나의 허전한 마음을 채워주었고, 락 공연장에서 거대한 스피커 앞에서 몸과 마음의 제동장치를 풀었다. 그렇게 열기에 몸이 달아오르면 바깥으로 나와 그냥 비를 맞곤 했다. 그 후로 10년이 넘었지만 그때만큼 몸과 마음이 자유로웠던 순간은 없었던 듯하다. 지하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마주치는 낯선 공간에 가슴이 설렜고, 작고 어두운 곳에서 나의 20대는 밝게 타올랐다.
선택의 폭이 넓다는 건 주관을 없애버린다. 월 3,000원 스트리밍 서비스 이용한 이후부터다. 음악을 찾아 듣지 않는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멜론 DJ가 정해주는 한 무더기의 음원을 틀어놓을 뿐. 블로그를 뒤지며 가삿말을 다이어리에 메모하지도 않고, MP3 파일을 다운로드 받으러 어둠의 경로를 헤매지도 않는다. 취향저격 인터넷 커뮤니티를 매일 같이 들어가서 음악을 설레 하며 찾지도 않는다. 각자의 소중한 보물상자가 사라져버린 느낌이랄까? 임정희의 '눈물이 안 났어'를 무한 반복하며 이별의 아픔을 달래기보다는 '이별할 때 들으면 좋은 노래'를 틀어 놓는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각날 때마다 그 사람의 미니홈피를 찾아가 노래를 엿들으며 설렜다. 지금은 다른 사람이 어떤 노래를 듣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가늠할 수도 없다. 빠르게 소비되고 빠르게 잊힌다. 음악으로 인한 소중한 기억도 줄어든다. 거짓말처럼 기억나지 않는 어제와 오늘이 쌓여가고, 이 스트리밍 공간 속에서 나의 감성도 색깔을 잃어간다.
홍대나 합정에는 여전히 예전의 클럽 공간이 남아 있다. 최근에는 '라이브 클럽데이'라 하여 '사운드데이'가 부활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하지만 좀처럼 찾지 않는다. 퇴근 후 번잡한 홍대에서 20대의 젊음과 함께 흥얼거릴 열정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단순한 팬과 뮤지션의 관계가 아니라 좀 더 밀접한 공기를 느끼고 싶었다.
'오늘 나는 이런 하루를 보냈어요. 당신의 하루는 어땠나요.'
'나는 요새 이런 고민을 안고 있어요. 당신도 그러나요'
'삶은 고되지만 저는 가끔 살만하다고 느껴요. 왜냐하면...'
음악을 들으러 가기보다는 이야기를 들으러 가고 싶은 기분. '달빛요정 역전 만루홈런'이 '쓰끼다시 내 인생'을 부른 뒤 '참 살기 힘든 세상이죠'라며 말문을 텄던 것처럼. 순서에 밀려 노래를 끝나고 바로 내려와야 하는 홍대의 클럽이 아니라, 작은 공간에서 옹기종기 둘러앉아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에서. 사람 대 사람으로.
그러던 중 뮤지션도 비공개, 장소도 비공개인 ROOM CONCERT를 발견했다. 참여 방법은 유료 입장권 구매가 아닌 공연이 필요한 자신의 사연을 적는 것이다. 언제든 돈을 내면 선택할 수 있는 스트리밍이 아닌, 나의 감성과 노력을 들여야 소장할 수 있는 MP3 같았다. 사연이 당첨된 사람들에게만 공연 장소와 뮤지션을 공개한다. 그렇게 두어 번의 퇴짜 받은 후에 강남의 한 키친 플레이스에서 ROOM CONCERT를 만날 수 있었다.
그날 옥탑방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미국 여행을 꿈꾸는 솔직한 세 명의 남자 뮤지션을 만났다.
그들은 노래를 한 곡 시작할 때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서울에 올라와 두려움과 기대감을 오가며 살았던 시간들을 담은 '야경', 어릴 적 살았던 달동네를 떠올리며 만들었던 '집', 아직은 순수함을 잃지 않고 사랑하고 싶다며 부른 'Midnight Picnic'까지. 겨우 노래 서너 곡을 불렀는데 시간은 어느덧 한 시간이 지나갔다. 자신의 공연이 끝난 뒤에도 공연장에 남아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을 홍보하며 친구 맺기를 권한다. 돌아와서 미국의 버스킹 이야기를 해주겠다는 약속도 놓치지 않고.
음악과 그에 담긴 이야기를 동시에 듣는 공간. 김광석이 1,000번의 공연을 이어가던 학전 소극장의 공연처럼 2016년에도 공연장보다 더 작은 공간에서 사람들과 소통하려는 뮤지션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는 수천 곡의 명곡을 담고 있는 스트리밍 서비스가 줄 수 없는 기억을 남겨준다. 그들의 노래는 작은 공간 속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로 특별하게 기억될 것이기 때문에.
12년 전 매 순간순간의 감성에 어울리는 곡을 찾는 노력으로 모은 300곡의 MP3 음원들처럼.
https://youtu.be/r6PyjDENm2k?list=PL4_SsHNp9R6eVoPTUopaGFussRfK5S6K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