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이 많은 나는 “만약에”라는 상상놀이를 즐긴다. 생각지도 못했던 경험들을 우연히 하게 되는 해외 여행은 나에게 놀이공원이자 배움터이다. 80년대 끝자락에 국제정치학을 공부하고, 외국 사례에 관심이 쏠려 있던 나를 사대주의, 친미, 반미, 국수주의 등의 이름으로 나는 자기 검열을 했다. 막연히 남의 떡이 더 좋아 보였던 걸까? 우리 것에 대한 위축되는 마음이 있었나? 이런 개인적 관심으로 한국과 미국의 국경인 담벼락 위에서 직업을 갖게 됐다. 이 쪽 저 쪽을 살펴 보다가 서로 통할 틈이 보이면, 높은 담이 걸림돌이 되지 않는 방법을 궁리했다. 양국에 있는 사람들이 이 담을 디딤돌로 삼아서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도록 정책을 만들었다.
“몰라서 그렇지 미국에 와서 우릴 만나면 좋아하게 될 거야.”
이 말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서 외교 정책의 바탕을 깔았던 미국 정치인이 한 말이다. 전세계에서 차세대 리더들을 선발하고, 단기로 미국을 경험하게 한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우리네 정서가 미국 사회에서 작동을 하는 사례이다. 한국과 미국의 시민사회를 연결하는 대민외교 분야에서 20년을 보내는 동안 국무부의 “국제방문자리더십프로그램”은 내가 가장 사랑하던 업무였다.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활발한 기여를 하고 있는 차세대 리더들을 발견하고, 유사한 일을 하고 있는 미국인 동료들을 현지에서 만나고, 2-3주 동안 관계를 형성하게 한다. 여행을 넘어 여행같은 출장인 이 프로그램에 참여할 리더들을 나는 신바람이 나서 찾았다. 서울 보다는 지방을, 남성 보다는 여성을, 해외 경험이 있는 사람 보다는 처음인 사람들을, 정치인 보다는 시민사회 활동가들에게 이 연수의 기회가 닿도록 정성을 기울였다.
사진: Unsplash의Michał Parzuchowski
가슴에서 쿵쿵대는 울림의 소리는 국경의 담에 있던 나를 흔들고 말았다.
한국의 시민사회 리더들이 미국 사회를 통찰하는 기회를 갖도록 하는 일이 업무였던 나는 단순한 직장인 너머의 역할을 내게 요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바람이 나의 내면에서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한국도, 미국도 아닌 나라들의 국경 너머의 세상으로 몸이 반쯤 기울어져 있었다. “유럽의 시민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아프리카는 전혀 모르고 살았네.” “한국인들이 글로벌 무대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무척 많은데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도를 넘는 내 호기심은 결국 내가 앉아 있던 담이 무너지게 했다. 천직이라 여기던 경력에 큰 틈을 내고 말았다. 그렇게 퇴사를 했다.
사진: Unsplash의Nik
틈은 단절인 동지에 연결이다.
무너진 담의 잔재 속에서 여전히 틈 너머를 상상하자, 지리산이 눈에 들어왔다. 매년 가을이 되면 지혜로울 “지(智),” 다를 “이(異)”자로 된 지리산으로 전국의 시민활동가들 수백명이 모인다고 했다. 행사의 주최인 사회적협동조합 지리산이음의 웹사이트에서 “다보스 포럼과 비슷한 지리산 포럼을 꿈꾸며” “사람 마을 세계를 잇다”라고 적힌 문장들을 읽자, 내 가슴을 또 뛰었다.
“새로운 바람을 잇다”
나의 바람과 이어지는 사람들을 지리산에서 여러 명 만나고 싶다. 그 묘책을 찾기까지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았다. 참석자들간에 관계가 형성되도록 발표 시간을 주고,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연대하도록 프로그램은 구성되어 있었다. 얼른 신청서를 썼다. “K-컬처에 관심있는 해외활동가들이 지리산으로 입국한다면”이라는 역발상을 하자 나는 온몸이 들썩였다. 결국 “한국과 해외의 혁신가들이 연결되는 활주로를 놓는 방법”이란 제목을 붙인 발표를 10분간 할 기회가 주어졌다. 발표 장소의 이름은 “들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