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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른손 Apr 10. 2019

<이별,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02. 이별의 순간. 신라면과 참이슬

배는 고픈데 집에 안주가 없을 때, 나는 꼭 신라면을 끓여 참이슬 1병을 비운다.

소주와 라면은 너무나도 흔하고 쉽게 구할 수 있는 '보통사람'들의 '보통 음식'이다.

일이나 생활이 너무 지치고 피곤할 때는 꼭 소주가 쓰다. 소주의 씁쓸함을 삼키며, 그 날 하루의 고됨과 외로움을 달랜다. 알코올의 화학작용으로 사고체계가 잠시 마비되고, 잠시 아픔을 망각할 때쯤 허기가 진다. 그럴 때는 방금 끓인 알싸하고 매콤한 라면을 먹으며 다시 한 잔의 소주를 들이켤 채비를 한다.


최근 K와의 1년간의 연애를 끝냈다. 다시 한번 지긋지긋한 이별의 순간을 맞이하고야 말았다.

우리는 비교적 '무난하게' 헤어졌던 것 같다. 2월 말의 어느 날, 나는 어느 날과 같이 지하철을 기다리며 그녀에게 전화했고 안부를 묻고, 그날의 컨디션은 괜찮은지, 왜 이렇게 목소리에 힘이 없는지를 물었다. 또 어제 엄마를 위로해드린 일들을 이야기하며 넋두리를 했다. 하지만 뭔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차갑게 내려앉은 공기, 달라져버린 목소리의 톤으로 알 수 있었다. '이별의 예고'였다.


이별 전, 그녀와의 한 두 달은 우리는 '무난'하게 때로 행복하게 웃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서운함에 서로 갈등을 빚기도 했다. 점차 '나의 잘못'이 기인하지 않는, 그녀 자신에서 내재된 짜증과 화가 늘어나는 그녀에게 예전과는 다르게 가끔 감당하기 힘들다는 내색을 비추기도 하고 여느 때와 같이 내가 그저 감내하며 넘어갔다. 그렇게 우리 사이에 간극은 점점 벌어져갔다. 서로 멀어져 가는 것에 '당연하다'라고 방관하고, 서로가 그저 '익숙해져 가는 것'이라고 치부했었다. 불과 전날에도, 우리는 서로에게 늘 그렇듯  '사랑해'라며 속삭이며 잠을 청했다.


그녀의 업무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쯤 늘 그래 왔듯 전화로 일은 힘들지 않았는지, 고생했다며 위로와 안부를 물었다. 그러나 이내 그녀가 세상 무엇보다 차갑고 무거운 한 마디를 뱉었다.


"헤어지자."


마치 몰랐던 일인 양, 갑자기 뒤통수를 세게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뇌의 모든 활동이 멈췄다. 이내 감정을 추스르고 그녀에게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내가 더 노력해볼 수 없는지, 내가 바뀌면 달라지지는 않는지 떨리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묻고 애원했다.  


그녀는 나의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언했다. 이별을 통보하는 이유가 나의 잘못과 행동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며,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감정에 대한 갈구, 흔들림 역시 그 이유가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자신의 감정이 식어버렸다는 혐의를 묵묵히 인정할 뿐이었다. '만나서 이야기해보자', '서로 감정을 정리할 시간을 가져보자'는 나의 부탁을 냉정히 거절했다. 지난 한 달간, 그녀는 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몰래 정리했다고 한다.


더 이상의 돌파구도,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타당하지만', '납득이 가지 않는' 마음의 온도차, 그녀는 권태를 이겨내지 못했다. 그녀로 하여금 너무도 일반적인 보통의 연애와 사랑의 섭리가 작용한 것이었다. 그녀의 결심은 확고했고, 나는 끝내 수긍했다.


"그동안 고마웠어. 정말 많이 사랑했고, 나도 많이 잘못했어."

"너도 그동안 참 많이 힘들었겠다."

"앞으로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 잘 지내, 끊을게."


그날의 기억은 뇌의 방어기제 덕분인지 희미하지만, 이렇게 지극히 '보통스럽게' 막을 내렸다.

그녀와 나의 그간의 유대, 추억, 교감 등이 '헤어지자'라는 간편한 말 한마디, 전화통화로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다는 점이 허탈하고 실망스러웠다. 그리고 가벼웠던 그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 안타깝고 아쉬웠다.


이별과 연애의 끝은 이렇듯 너무나도 가볍다. 요즘은 흔히들 말하는 '괜찮은 이별', '얼굴을 보고 제대로 헤어지는 이별' 따위는 이별을 통보하는 입장에서 대부분 성립되지 않는다. 전화와 메시지로 빠르고, 간편하게 관계를 정리하는 '인스턴트식 이별'. 이것이 최근 우리들이 속한 사회의 표상이자, 트렌드로 인식되어가고 있다.


집 앞 편의점에서 약 2000원이면 구입하는 라면 한 봉지, 소주 한 병처럼. 굳이 화려하고 번거로운 과정 없이 1분이면 꾸밀 수 있는 술상처럼. 그녀가 통보한 이별의 가벼움에 감탄을 표한다.


근사한 레스토랑의 디너 플레이트와 같던 사랑이 어쩜 이리 간편하고 별거 아닌 라면과 소주로 끝날 수 있는지, 너무도 안타깝다. 인스턴트는 아니더라도, 4계절을 함께한 한때는 사랑하고 고마웠던 사람에게 따끈한 집밥 정도의 이별의 예의를 차리는 것이 그리도 어려웠을까.


오늘 그녀와의 이별 같은 소주와 라면 한 그릇으로 그 씁쓸함을 음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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