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유연 Nov 23. 2021

바쁘게 살아야 해야 할 일을 다 할 수 있는걸

그러면, 무언가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오래간만에 혼자 카페에 왔다. 얼마 전에 새로 생긴 곳인데 공간 가운데에 큰 책장이 있다. 책장에는 카페 주인의 소장본으로 보이는 책들이 가득하다. 제목을 훑으며 카페 주인에 대해 상상한다. 누군가가 소유한 책들을 보면 그 사람의 관심사나 성향을 생각하게 된다.


노래는 빠르지 않은 템포의 재즈. 초코 브라우니 위의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쫀득하다. 하얗고 큰 머그컵 안에 따듯한 커피가 가득 들어 있다. 만족스럽다. 이런 곳에서는 조금 여유를 즐겨도 좋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카페가 아무리 예뻐도 마음속의 초조함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다. 기왕 카페에 왔으니 해야 할 일을 다 끝내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적어도 체크리스트 두 개는 끝내고 가야지. 가장 안쪽의 콘센트가 있는 자리까지 들어가 노트북 전원을 꼽고 키보드를 두드린다.


그렇게 해야 할 일을 하다 충동적으로 브런치를 열었다. 왜 이렇게 바쁘고 해야 할게 많지. 이게 맞는 건가? 지나가는 10분, 잠시 앉아있는 20분이 이렇게까지 아깝고 죄책감이 드는 게 정상인가? 어쩌다 이렇게 효율만을 따지게 되었을까. 무엇이든지 가성비를 먼저 생각하고 뽕을 뽑으려 한다. 이래서야 도저히 행복할 수 없다. 어쩌다 난 여유시간에도 '쓸모'를 찾으려고 전전긍긍할 테니까.


항상 초조하다. 항상 불안하다. 해야 할 일을 다 끝내지 못할까봐. 이뤄야 할 일을 이루지 못할까봐. 성과가 나지 않을까봐. 틈날 때마다 체크리스트를 적어 둔 플래너를 꺼낸다. 하나 둘 리스트를 지워도 네다섯 개의 새로운 항목이 생겨난다. 할 일은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의심한다. 내가 진짜로 바쁜 건가. 아니면 바빠야 하는 건가. 내 무의식 어딘가 '바쁘지 않은 삶은 잘못된 삶이다'라는 간판이라도 걸려 버린 것은 아닌가. 바쁜 삶을 사는 게 옳다고 여기니까 어떻게든 바쁜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닐까.



바쁘게 살면 무언가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 박아둔 모양이다. 나는 이루고 싶은 게 많으니까 당연히 좀 더 많이, 좀 더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정말로 많은걸 이루리라는 확신은 없다. 보장도 없다. 당연하지. 세상 사람들 누구나 열심히 사는걸. 그렇지만 어떤 보상도 기대하지 않고 어떻게 하루하루 초조한 뜀박질을 견딜 수 있겠어.


버티려고 희망이라도 걸어 놓고 달리는 거다. 눈앞에 당근을 매달고 달리는 경주마들처럼 끝없이 쉼 없이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서. 이 초조함이 옳다는 강박을 지키면서. 초조함이 나쁜 것만은 아닐 테다. 초조와 불안 덕에 많은 일들을 효율적으로 끝낼 수 있다. 현재의 내가 부족하다는 인식은 자기 발전에 대한 끊임없는 욕구를 생산시킨다. 그런데,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할까?


아주 가끔 머리에 아무것도 달려있지 않은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은 쫓아갈 당근이 없다. 무언가를 쫓아 끊임없이 뛰지 않아도 괜찮아 보인다. 만족스러워 보인다. 물론 속마음까지 알 길은 없지만 꾸며낸 만족 같지도 않다. 나도 언젠가 이루고 싶은 것들을 전부 다 이루고 나면 머리 위의 당근을 떼어놓을 수 있을까. 목표를 위한 순간이 아닌 그저 존재할 뿐인 시간을 가치 있게 여길 수 있을까. 더 이상 초조하고 불안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바쁘지 않으면 체크리스트의 반조차 끝내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저번 주 월요일에 수업한 120장짜리 피피티 써머리를 오늘까지 만들기로 했잖아. 그거 정리해서 티스토리랑 블로그에도 올려야지. 리포트도 써야 하고 밀린 강의도 들어야 해. 원래 오늘 소화기 족보 다 보기로 했는데. 기출은 언제 풀지. 그리고 책도 읽고 싶고. 집안일도 조금 밀려있네. 재테크 공부도 해야 하는데. 그리고 그 모든 걸 오늘 안에 해야 하지.


초조함 없이 하루만에 이걸 다 끝내려면 얼마나 멘탈이 강해야 하는 거야?




오늘 행복한 사람이 내일도 행복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오늘 초조하다면 내일도 초조할 것이다. 목표를 이루어도 여전히 새로운 목표가 생기고 또 여전히 초조할 것이라면 애초에 목표를 만들지 말아야 할까. 아니면 아무리 바빠도 여유롭게 처리할 수 있는 능력과 멘탈을 길러야 하는 걸까. (물론 그러려면 스스로를 더 몰아치고 해야 할 일이 더 늘어나겠지만.)


인생은 원래 헤매는 것이라지만 가끔은 삶이 먼저 똑 부러지는 정답을 내놓아 주었으면 좋겠다. 잘하고 있다고 다독여줬으면 좋겠다. 성취, 성취, 성취, 성취만 따라온다면, 괜찮겠지만, 그러지 못해도 나아가야 하니까.


그래서 초조한 내 마음이 문제인지, 정말로 바쁜 게 문제인지, 무엇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오늘도 바쁘게 살아야 해야 할 일을 다 끝낼 수 있는걸. 일상을 산다는 건 끊임없이 떠오르는 의심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해야 할 일을 해 나가는 것이겠지. 아무튼 말이야.





성취. 2021. 디지털 드로잉.



매거진의 이전글 하늘이 예뻐서 울적하기도 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