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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인 Jan 04. 2021

피아노 수업은 아니지만

재능이 별 건가

독서수업에 유난히 학생이 안 들어오는 반이 있다. 아홉 살 재민이가 있는 반이 그렇다. 다른 반들은 최소 네 명씩 들어찼는데 시간이 애매해서인지 재민이와는 오랫동안 일대일 수업 중이다. 혼자 들으면 심심해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재민이와는 심심할 겨를이 없다. 코로나 때문에 시작한 온라인 수업에서는 더욱 그렇다.     


12월 막바지, 재민이와 수업을 마치고 시계를 보니 끝나려면 십 여분이 조금 남았다. 일대일로 진행하다 보니 재민이와의 수업 진도는 늘 빠르기 마련이다. 얼마 남지 않는 신년을 생각하며, 이제 재민이가 몇 살이지,라고 묻자 책을 덮던 재민이가 외쳤다.


  “저 이제 열 살이에요! 와, 십 년이나 살았어.”


내가 재민이의 십 년 인생을 축하하며 물었다. “십 년이나 살아보니 어때?” 재민이는 입을 삐죽거리며 소파에 몸을 쭉 기댔다. 그리고 말했다.


  “인생 참 쓰네요!”


  재민이의 인생이 쓸 만도 하다. 국어, 영어, 수학, 피아노 학원을 다녀야 하고 두 살 터울의 언니랑은 매일 싸우고,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두부’의 배설물을 치우는 역할까지 도맡았으니 말이다. 게다가 재민이는 자신이 모든 걸 어설프게 해서 속상하다고 했다. 언니인 재안이는 그림도 월등하게 잘 그리고 피아노도 잘 치는데 말이다. 머리 좋은 언니와 자주 비교했던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뭐라고 말해줘야 할까 고민하던 즈음, 재민이가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수업 끝나려면 얼마나 남았어요?”

  “5분 정도?”

  “그럼 잠깐 피아노 연주 들어보실래요?”


  내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재민이는 언니 방에 있는 피아노 앞으로 갔다. 재민이가 핸드폰 고정에 실패해서 피아노를 치는 재민이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우리는 연주 소리만 듣기로 합의를 했다.


  “친다요?”


  깜깜한 화면 너머로 들려오는 연주 소리는 어쩐지 익숙했다.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 ost 이기도 한 히사이시 조의 ‘summer’였다. 나도 연습해본 바로 그 곡. 지나간 여름들을 떠올리게 하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선율을 지닌 곡이었다. 묵묵히 재민이의 연주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재민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지금 악보 안 보고 치는 거예요!”     


  어린 시절, 꽤 오랜 날을 피아노 학원에서 보냈던 나는 악보 없이 치는 악기 연주에 대한 쾌감을 안다. 사실 악보를 익힐 때면 음악보다는 악보라는 답안지에 집중하기 때문에 틀리면 어쩌지, 조마조마한 마음이 컸던 것 같다. 게다가 내가 악보를 틀리게 보면, 지켜보던 피아노 선생님이 볼펜을 들고 내 손가락 마디를 쿡쿡 찌르기도 했다. 그렇게 어려운 과정을 통과하면 스스로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때 자유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마치 뒤에서 누군가 끌어주던 자전거를 혼자 힘으로 탈 수 있듯이 말이다. 악보를 숙지했을 때는 기존의 악보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내 식대로 반주를 살짝 바꿔보기도 하고 음을 바꾸기도 했다. 선생님도, 악보도 없는 나만의 세계에서. 그리고 그렇게 연주할 때 나는 가장 즐거웠다.     


  악보 없이 치던 재민이의 ‘summer’가 끝나자 수업 종이 쳤다. 재민이는 뒷부분이 잘 안 나서 드문드문 멈췄던 것을, 제 식대로 쳐버린 것을 아쉬워하는 중이었다. 나는 재민이에게 제안했다.


  “재민아, 다음에 또 시간 남으면 그때도 쌤한테 연주 들려줄래?”


  재민이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재민이는 뒷부분을 더 완벽하게 외워오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냥 재민이의 연주를 듣는 게 좋다고 말했다. 악보에서 벗어나 뭔가를 자유롭게 연주하는 것 또한 멋진 재능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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