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겨울 바람은 '괴물'이다. 괴물은 집을 삼켜 버릴 듯 큰 소리로 울어댔다. 술 기운에 잠들었는데 괴물의 울음 덕분에 일찍 잠을 깨었다. 일찍은 무슨, 잠을 못 잔 셈이 되어 버렸다.
분명 늦은 밤에 잠들었는데 깊은 밤에 정신이 맑아질 정도로 잠을 깨게 된다면 십중팔구 머리 맡에 두고 잔 스마트폰을 손에 쥐기 마련이다. 드라마에서 종종 보던 좋은 침대에서 부자들은 허리라도 끌어 당긴 후 스탠드 조명을 켜겠지만 그저 누워서 잠시 시간이라도 확인하려다가 SNS 삼매경에 빠질 뿐이다.
인기도 없는 SNS에 달린 댓글이나 좋아요를 확인하는 깊은 밤이라니! 잠시 자책할 틈도 없이 포털 사이트의 스포츠 기사들을 훑는다. 이번 시즌을 말아먹고 있는 손흥민의 기사나 프리미어리그 상위팀들의 경기 결과도 확인한다. 읽다가 보면 언젠가 읽었던 기사이다.
어제 밤에 읽다 만 책을 읽어 보겠다고 기어이 스탠드를 켰다. 눈에 안 들어온다. 쉬운 이야기인데 잡념들 때문에 글자만 쫓고 있다. 일본의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의 생활사를 다룬 책인데 읽히지가 않는다.
간밤에 나를 잡아 먹겠다던 '바람'은 낡이 밝으니 '눈보라'로 발전했다. 제주가 이다지도 춥고 바람이 많고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이었던가? 이제 2년차 제주살이를 맞는 나로서는 경험치가 부족하다.
며칠 충만한 느낌이 드는 식사를 하지 못했다. 기호를 따지기 보다 기능에 우선한 식사를 며칠 했더니 뜨끈한 국밥 한 그릇이 먹고 싶었다. 며칠 전 먹었던 우거지해장국이 떠올랐다. 눈보라를 뚫고 다녀오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런 작은 일 따위에 결심까지 해야 한다니 제주도의 '괴물'이 두렵긴 했던 모양이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저녁식사를 토스트와 달걀프라이로 때웠다. 나트륨 국물을 한 바가지 배에다 들이부었으니 다소 검소하고 건강한 식단이라고 위로하면서. 역시 기호보다는 기능을 따진 식사였는데 일상의 식습관에서 대단히 벗어난 모험이었다. 1년 전 쯤 사두고 한 번도 열어 본 적 없는 땅콩버터가 조연으로 출연했다.
중요한 건 '현재'이다. 나는 2023년을 살고 있는 지구인이다. 스스로 바꿀 수 있는 시간과 인생이 있고 결코 바꿀 수 없는 환경과 역사가 있다. 벗어날 수 없는 '자본주의' 상업제도 아래에 살고 있기도 하다. 기시 마사히코의 생활사 구술 책들을 읽기도 하고 기능적인 식사로서 생명을 부지해야 하기도 하는 것이다.
유쾌하고 지적이고 건설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온라인에 공개적인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름의 유머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유머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진지해지다 보니 막힌 길을 향해 걸었던 것 같다.
손흥민이 남은 시즌을 지난 시즌과 같은 페이스로 올라와 경기해줄 것을 기대한다. 괴물 같은 겨울 제주 바람이 지나가고 봄이 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