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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란경 Apr 11. 2019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따뜻했던 사람.

브런치의 첫 글을 이렇게 쓸 줄은 몰랐다.

그래, 사람의 일은 한 치 앞도 모른다고 했지.

그래도 그를 추모하며 쓰는 이 글이 처음이라는 것이 뜻깊고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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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2학년 여름 교회에서 같은 마을의 순장으로

만났던 그의 첫인상은 참 특이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시끄러워 친해지지 못할 거라 생각했었지.

더군다나 다른 마을에서 파송을 받아 중간에 합류하게 된 내가 소화하기엔 쉽지 않은 캐릭터였다. 그런 생각도 잠시 어색한 첫인사를 시작으로  낯선 사람들과 모임을 마치고 기도제목을 나누는 시간에 알게 된 그의 ‘영혼 사랑’은 낯선 와중에도 참 인상적이었다. 보통 기도제목이라 함은 본인의 소원을 먼저 말하기 마련인데, 오빠의 기도 리스트는 순모임에 나오지 않는 장결자를 위한 내용이었다. 그 첫인상은 내가 기억하는 오빠의 삶의 전부였고, 푯대였으며,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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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년의 행복했던 2 마을 순장 사역이 끝난 후 대학부 행정국에서 1년의 사역을 그와 함께 하게 되었다. 너무 불같은 성격에 헌신적인 리더 밑에서 사역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때의 나도 개복치의 끝을 달리는 초 예민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심지어 허리디스크라는 끔찍한 고통과 4학년 졸업작품 챌린지까지 안고 갔던 1년은 정말 쉽지 않은 길이었다. 거절은 죄악이라고 생각하는 리더 덕분에 그때의 우리는 참 고된 시간을 보냈었지. 그때 나를 힘들게 했던 원인 중 하나는 사람들의 이중적인 모습이었다. 평소에는 귀찮아하면서 가장 힘든 일이나 꼭 필요한 일이 생기면 당연한 듯이 불러 도움을 받는 행태. 사람들의 태도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웃으며 궂은일을 해내는 오빠의 모습에 참 속상하고 화가 많이 났었다. 시간이 지나 옛날을 추억하던 오빠는 나의 그 ‘분노’가 너무나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말을 듣고 스스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머쓱해져 내가 더 힘들었다며 성을 내며 대화를 마무리했었던 것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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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연히 만나게 된 오빠는 예전에 비해 훨씬 기세가 꺾여있었다. 늘 밝고 눈을 마주치고 잘 이야기하던 사람이 중간중간 다른 곳을 응시하고, 괜찮다고 대화의 마무리하던 사람이 말씀 붙잡고 버티고 있다는 말을 했다. 현실적인 어려움과 마음고생이 오빠의 일상으로 자리 잡아 불같은 에너지를 빼앗아 갔던 걸까.. 지쳐 보이는 그에게 나는 뭐라고 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내 말을 줄이고 이야기를 잘 들어줘야지. 이 시간이 위로가 되기를. 하고 바랬던 것 같다. 그렇게 2주가 지나고 새벽에 급한 비보를 접하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심정지로 병원에 실려갔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실시간 기도제목을 받고 중보를 하면서도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었던 것은 평소와 달랐던 내가 본 오빠의 마지막 모습 때문이었을 거다.

장례식장을 가면서도 현실감이 없던 나는 현장에 도착해서야 울음이 쏟아냈다. 위로 예배 시간에 자신의 힘듦에도 타인을 위해 자신의 것을 헌신하고, 냉혹한 시선에도 타협하지 않았던 오빠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고 외로웠을지 감히 헤아릴 수 없어 가슴 아팠다. 그럼에도 가장 지쳤을 때에 평생 사모하던 하나님 곁으로 갔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조문객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빈소가 미어터지는 것을 보며 그동안 오빠가 뿌린 사랑이 조금이나마 보상받는 것 같아 안심되면서도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했다. 그리고 그렇게도 사랑하던 이들이 오랜만에 만나 근황을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기뻐할 모습이 상상되어 웃음이 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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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올라오는 srt안에서 고단했던 그의 삶이 느껴져서, 받기만 했던 사랑에 미안해서 참 많이도 울었다. 옆에 앉은 아저씨가 힐끗 거리며 쳐다보아도 주체가 되질 않아 엉엉 울면서 집으로 왔다.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옛날 사진을 발견해서, 날씨가 너무 좋아서, 추억이 불현듯 생각나서 문득 찾아오는 눈물바람은 계속되고 있다. 아마 한동안 이럴 테지. 궁상떨지 말라는 오빠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아 마음을 추스르려 하지만 완벽한 컨트롤 실패다. 곧 웃으며 말할 수 있는 날도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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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물어본 적이 있다. “오빠는 어떻게 그렇게 낮은 모습으로 사람들을 한결같이 사랑해요?” 질문을 듣자마자 얼굴이 벌게지고 손사래를 치면서 아직 한참 멀었다고 멋쩍게 웃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만났던 사람 중에 가장 사랑이 많았고, 외골수였고, 신앙에 절대 타협하지 않았던 바보 누리수 오빠.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며 열렬히 사모했던 천국에서 이제 편히 즐겁게 쉬기를 바랍니다. 오빠 발톱의 때만큼도 못하겠지만 나도 정신 차리고 열심히 싸우고 견디다 갈게요. 그동안 고생 많았으니 푹 쉬어요.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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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02.13~2019.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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