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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세금쟁이 Nov 07. 2023

무진기행- 자유를 갈망하나 현실에 순응하는...

무진기행은 장인어른 회사에서 일하며 곧 승진을 앞둔 주인공이 휴가를 얻어 고향 무진에 찾아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승진으로 인해 더 커지게 된 책임감에 부담스러우면서도 놓지 못하는 '나'와 가진 것을 다 버리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는 또 다른 '나'와의 싸움에서 결국 주인공이 무엇을 택하는지, 그로 인해 독자들은 또 어떤 선택을 할 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주는 소설이다.


대퇴사 시대인 지금, 이상과 현실 가운데 주인공과 같은 고민을 가진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 소설을 통해 자신의 삶의 방향성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절로 필사 하고 싶게 만드는 탁월한 문장들을 하나씩 음미하면서 행복한 독서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안개와 명산물

"무진엔 명산물이......뭐 별로 없지요?"
라는 아무개의 대화에서 주인공은 스스로 답한다.


"무진은 내가 관념 속에서 그리고 있는 어느 아늑한 장소일 뿐이지 거기엔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았다. 무진이라고 하면 그것에의 연상은 아무래도 어둡던 나의 청년이었다."

무진을 대표하는 명산물은 바로 안개이자 자신의 청년시절을 상징한다.

주인공은 앞이 보이지 않는 그저 희뿌연 안개처럼 자신의 젊은시절 역시 앞이 보이지 않는 모호함 그 자체 라고 여긴 것 같다.

무진은 현실로부터 도망가고 싶을 때 마다 찾는 도피처이자 이상이다. 서울에는 자유의지가 없다.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승진의 자리가 아니라 장인이 세워준 자리였다. 무진에서는 자유의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세무서장 '조'를 비롯해 교사인 인숙과 남자 후배는 다들 개인의 노력으로 직업을 이루었다.

그에 비해 '나'는 스스로 이뤄놓은 것이라곤 없다.




"나는 한 손으로 묘위의 긴 풀을 뜯었다. 풀을 뜯으면서 나는, 나를 전무님으로 만들기 위하여 전무 선출에 관계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 호걸웃음을 웃고 있을 장인 영감을 상상했다.
그러니 나는 묘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자신과 닮은 인숙


인숙이가 무진에서 죽더라도 찾아올 가족이 없을거라고 했다.

"나는 그 여자가 지금 어디서 죽어가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어서 가서 만나보고 싶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제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너무나 닮은 인숙이다. 단순히 불륜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젊은 시절의 '나'와 인숙의 하룻밤은 두 인물이 동일시됨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여자들이 성기 하나를 밑천으로 해서 시집가보겠다는 고 배짱들이 괘씸하단 말야."


인숙이 바로 그런 여자라는 세무서장 '조'의 말에 주인공은 자기도 그러한 사람이라고 느꼈을지 모른다. 자신도 부잣집 데릴 사위이기 때문에.


"너만큼만 사는 정도라면 여자가 거지라도 괜찮지 않아?"
내가 말했다.
"그래도 그게 아니다. 내 편에 나를 끌어 줄 사람이 없으면 처가 편에서라도 누가 있어야 하는 거야."

인숙을 택할 것인가 서울의 아내를 택할 것인가 혼란스러운 '나'의 모습.

결국 든든한 빽을 가진 처가 있는 서울을 택할 것이라는 복선이 아닐까.



#어김없이 출근

"그렇지만 내 힘이 더 세니까 별 수 없이 내게 끌려서 서울까지 가게 될 걸."


그날 밤 진탕 술을 마신다.
후배 박이 건네준 책은 거들떠 보지 않고, 술로 현실을 도피한다.

(역시나 '노력'따윈 하지 않는 '나')

" 모든 것이, 흔히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그 자유 때문이라고 아내의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살다보면 세월에 의해 나 다운 건 잊혀지기 마련이라고."


지금 '나'가 방황하는 것은 근본적인 나다운 삶을 찾기 위함이 아니라 현실로부터 일시적인 해방감에 젖은 것 뿐이다. 나다운 삶은 한낱 꿈이며 짧은 여행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영(아내)과 많이 다투며 상처받았다고 했다.

'아니야, 현실이 잘못된거야. 이건 나다운 삶이 아니야. 다른 것을 다 버리고 나다움을 찾을거야.' 라고 부정해보지만 금방 전보와 타협한다.

나다움을 찾는 여정을 긍정하기로 한다. 무책임했던 하룻밤을 긍정해보기로 한다. 하지만 편지를 찢어버림으로써 나 다움을 찢어버렸다. 현실로 돌아갔다.

어쩌면 처음부터 무진에는 가지 않았고
술에 찌든 채 희미한 꿈 속에서의 하룻밤 공상이 아닐까도 생각한다.


아침에 날아온 전보는 어김없이 다가오는, 거부할 수 없는 출근 시간을 알려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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