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소도시 인턴십 이야기
아침에 눈을 뜨면 새까만 방 창살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온다. 지저귀는 새소리.
'새소리에 잠을 깨다니. 백설공주다.'
베개 밑에 손을 넣어핸드폰을 꺼낸다. 10시 15분. 한숨 한 번 쉬고는 이불을 밀쳐낸다. 면 이불의 시원한 사각거림이 팔을 간지럽힌다.
외국에 나가 살면 챙겨먹기 힘들다고 하던데. 자취를 시작한 이래 이렇게 잘 챙겨먹은 건 처음이다. 제일 큰 냄비에 물을 담아 가스 불에 올린다. 멍하니 부엌을 둘러본다.
평범하지만 부족할 것 없는 이탈리아식 주택. 현관문을 열면 스무 평 남짓한 초록색 정원. 서울에서는 꿈도 못 꿀 집이다. 침실 두 개에 욕실 두 개, 넓은 거실 겸 부엌이 있는 집.
창문을 열고 밖을 본다. 초록색 벌판. 넓고 둥근 초록색 동산에 우뚝 솟아오른 네모난 저택 하나. 아침부터 풀을 베는 기계 소리가 요란하다.
집 안에는 적막이 감돈다.
이탈리아에 온 지 두 달이 다 되어간다. 나는 뭘 하고 있는 걸까. 방금 일어났지만 어김없이 졸음이 쏟아진다. 핸드폰은 아무 반응 없이 조용하다. 오늘도 일이 없는게 분명하다.
요즘엔 거의 매일 비슷한 꿈을 꾼다. 친구들이 나오는데, 어쩔 땐 동네 친구들, 어쩔 땐 학교 친구들, 때에 따라 다르지만 내용은 똑같다.
매 번 다같이 만나기로 약속을 잡는다. 언제 어디서 몇 시에 만나자고. 그럼 나는 스케줄을 확인하고는 나도 그 날 일이 없으니 만날 수 있겠다고 기뻐했다가 이내 ‘아, 나 이탈리아에 있지’ 하고 실망한다.
꿈은 무의식의 잠재라고 하던가. 요 며칠 같은 꿈만 꾸다 보니 정말 내가 이상해진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상해졌다고 한들. 할 수 있는 건없다.
창문을 열면 초록색과 하늘색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이 곳. 일거리도, 대화를 나눌 사람도 없이 그저 동양에서 온 작은 이방인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나는 점점 무기력해지고 있다.
냄비 물이 끓는 사이 팬을 올려 기름을 두른다. 그제 사둔 목살 한 덩이를 올려 굽는다. 고기 굽는 냄새. 목살 구이를 곁들인 토마토 파스타. 오늘은 가지와 그린빈을 잔뜩 넣었다.
이탈리아 요리지만 사실은 한국식 아침이다. 이탈리안들은 아침으로 파스타나 목살구이 따위 절대 먹지 않으니까. 오로지 커피와 빵이다. 샐러드조차 먹지 않는다. 같은 서양이라도 미국과는 전혀 다르다.
현관문을 열고 거실 쇼파에 앉아 파스타를 먹는다. 맛있다. 페페론치노 가루를 잔뜩 뿌린 한국식 파스타.
이 동네는 아시안마켓이 없다. 마켓은 고사하고 아시안과 관련된 거라곤 역 근처 중국인 가족이 운영하는 일식집이 전부다. 그들은 이 곳에 사는 유일한 아시안 가족이다.
혼자 정원을 바라보며 파스타를 먹고 있으니 익숙한 손님들이 현관을 기웃거리며 들어왔다. 고기 냄새를 맡은 고양이들이. 문 밖에 사료를 두었지만 고기 냄새를 맡은 이상 사료는 그냥 지나친다.
제일 먼저 내 다리 밑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은 페르시안 계열의 당당이다. 이 집에 와서 처음 만난 고양이로 첫 날부터 나에게 당당히 음식을 요구해서 지어준 별명이다.
회색의 뾰족하고 풍성한 털. 손을 뻗어 머리를 어루만진다. 손가락 사이로 털들이 부드럽게 삐져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