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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 더 덕 May 22. 2020

얻어먹는 젤라또가 맛도 좋다

이탈리아 소도시 인턴십 이야기

극장에 가니 아드리아나와 스테파노, 파비오가 먼저 와있었다.


 스테파노와 파비오는 누가봐도 부자지간인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똑같이 생겼다. 호리호리하고 큰 키, 긴 얼굴과 동그란 눈, 턱 주변의 수염.


처음 만났을 때 아드리아나는 스테파노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소개해주었다. 아버지나 남편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누가 봐도 파비오의 아들이었다. 아드리아나가 혼자 산다는 사실로 미루어 봤을 때 예전에 이혼한 것 같다.  


부모님은 내가 일곱 살 때 이혼했다. 그 때 엄마 나이 스물 셋. 지금의 나보다 어리다. 엄마는 열 여섯에 나를 낳았다. 나는 종종 엄마가 집을 나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랬다면 나는 지금과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 좀 더 밝고 티없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극장 정리를 좀 하자구'

아드리아나가 말했다.


여길 칠해라, 이걸 옮겨라, 간단한 주문에 맞춰 분주히 움직였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대부분 영어를 잘 못한다. 로마같은 대도시에서야 영어로 쉽게 대화할 수 있지만 이 동네에선 울릉도에서 영어 쓰는 꼴이다. 가장 먼저 배운 말도 '담을 봉투 주세요, 젤라또 작은 컵 얼마에요, 00 어디 있어요, 저 이탈리아말 할 줄 몰라요' 같은 말들이다.


스테파노와 파비오는 영어로 간단한 문장 정도는 말 할 줄 알지만 긴 대화를 나눌 정도는 아니다. 자연스레 극장은 이태리어로 떠드는 그들의 목소리로 채워졌다. 내 목소리가 울릴 틈은 없었다. 내가 좀 더 활발한 성격이었다면 어떻게든 말을 걸었을까.  


동양에서 온 조용한 작은 여자애. 토종 한국인으로 서울에 살던 나는 생전 처음 동양인이라는 타이틀을 실감했다. 이탈리아에서 동양인 여자가 얻을 수 있는 신분은 피해자 혹은 약자 뿐이다. 사람들이 보내는 낯선 시선에 나는 점점 쪼그라들고 있다.  


'이 정도면 다 된 거 같은데? 집까지 바래다줄까?'


아드리아나의 제안에 나는 괜찮다며 사양했다. 마을로 나온 김에 젤라또 사 먹으려고. 이 작은 마을에도 젤라또와 커피집이 족히 열 곳은 넘는다. 오늘은 극장 뒤에 있는 젤라떼리아에 가야지.


여름에는 제철 과일이 많아 그만큼 맛도 다양하다. 복숭아, 망고, 살구. 상큼한 과일 계열 하나, 피스타치오 하나, 크림 종류 하나 시켜야지. 완벽한 조합이다.


진열장에 코를 박고 열심히 고르는데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파비오였다. 파비오는 커피 한 잔을 시켰다.


'여기 젤라또 맛있어. 다 골랐어?'

'응. 레몬이랑 피스타치오랑 초코 먹을거야.'


그러자 파비오는 커피 값을 계산하며 내 젤라또 값을 같이 계산했다.


'?? 내 거 계산해주는거야?'

'응.'

'왜??'

'Why not?'


하고 파비오는 커피를 한 모금에 쭉 마시고는 윙크와 함께 챠오, 하며 떠났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만 빼고 수다 떠는 이태리 놈들이라며 속으로 꿍시렁 댔는데.. 직원이 건네는 컵을 받아 가게 밖을 나왔다. 레몬 맛 젤라또를 한 입 떠먹고는 혼자 중얼댔다.


'얻어먹는 젤라또가 맛도 좋다.'


이건 라즈베리와 피스타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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