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무의식적 장치가 너무 견고하게 자리 잡혀 있다. 그들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만 해석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 과정에서 방어기제는 일종의 필터처럼 작동한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은 비틀리고, 불편한 감정은 미뤄지고, 자기 모순은 의식의 영역 밖으로 밀려난다. 이러한 장치는 생존을 위해 마련된 것이지만, 동시에 사고의 확장을 막는 벽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 벽을 넘으려 하지도 못한다는 점이다. 메타인지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바깥에서 바라보는 능력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능력을 제한적으로만 사용한다. 자신의 감정과 사고를 객관화하는 순간, 그동안 자신을 지탱해온 방어기제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종종 가장 단순한 질문도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는다. “왜 화가 나는가?”, “왜 반복되는 실수를 하는가?”, “왜 이 말을 듣기 싫은가?” 같은 자기반성조차 불편한 진실을 드러낼까 봐 미리 차단한다.
이 무의식적 보호는 겉보기에는 평범한 일상과 감정의 안정으로 보이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는 성장의 한계를 만든다. 자기를 보호하려는 마음이 너무 강하면, 결국 자기 자신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된다. 인간은 본래 변화를 두려워하며, 변화는 곧 기존의 ‘나’를 위협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방어기제는 그 위협을 무력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무력화가 반복될수록, 사람은 자기 삶을 재구조화할 기회를 잃는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을 그렇게 살아간다. 보호받지만, 막혀 있는 상태로.
지능과 감수성이 높은 사람들은 이 장벽이 훨씬 얇다. 시야가 자연스럽게 넓고, 자기를 해석하는 능력이 빠르기 때문에, 무의식의 움직임을 쉽게 감지한다. 그들은 자신이 왜 불편한지, 왜 피하고 싶은지, 왜 어떤 말에 방어가 올라오는지 이유를 찾아가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능력은 때로 고통을 크게 만든다. 방어기제가 작동하기 전에 이미 스스로를 드러내버리기 때문이다. 심리적 통증까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면서, 고지능자들이 더 자주 고독과 우울에 빠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국 차이는 사고의 깊이나 지식의 양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도달할 수 있는 용기에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하는 데 너무 익숙하고,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반면 일부의 사람들은 보호보다 진실을 먼저 찾으려 하고, 그 과정에서 상처를 입더라도 결국 더 큰 자유를 얻는다. 인간이 성숙한다는 것은 방어기제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의식 위로 끌어올려 스스로 다룰 수 있게 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