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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린 아니고 기린 Aug 07. 2019

영화, 죄 많은 소녀(2018)

너무 쉽고 잔인한

실종된 친구와 마지막까지 함께 했다는 조사 기록은 소녀의 이름표를 떼어 버린다. 그리고 그 자리에 ‘혼자만 살아남은, 죄 많은 아이’라는 이름표를 붙여 버린다. 어쩌다 어른들의 세상은 무섭고 잔인해진 걸까 느낄 틈도 없이, 이름표는 또다시 바뀐다. ‘살아서 돌아온, 그러니 지켜줘야 할 아이’로.


영화 <죄 많은 소녀>는 경민의 실종 이후 영희를 둘러싼 모든 시선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증오와 분노, 용서, 연민과 동정, 그리고 외면까지. 이 모든 감정들이 너무도 쉽게, 잔인하게 비친다.


*


부모님을 따라 장례식장에 갔던 일들은 아주 어릴 때인데도 꽤 생생하게 남아 있는 기억들 중 하나다. 부모님의 설명을 들어도 영정 속 어른이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잘 모른 채 도착한 빈소. 살아 계셨다면 너를 예뻐해 주셨을 텐데 하는 어른들의 말. 모든 것들이 나를 이상한 감정 속으로 끌어당기곤 했다. 영정 앞에서 엉엉 소리를 내며 아이처럼 울던 어른들이 건너편 방에서는 화투를 치고, 일회용 접시 위의 음식들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는 모습은 이상함을 넘어 때로 괴상하게 느껴졌다. 슬프다는 건,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건 이렇게도 쉬운 걸까. 아니면 슬프지 않은 척 애쓰고 있는 걸까. 어린 나이에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어른이 되면, 지나가는 모든 감정들에 쉬워져 버리는 걸까 싶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아직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을 무서워한다. 그 말을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그도 모자라 나서서 남들에게 건네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다는 사실 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나와 주변 사람들을 스치는 모든 감정들을 쉽게 놓지 못한다.


영화를 보면서 계속 그때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영희를 둘러싼 모든 감정들은 허무할 만큼 쉽게 지나간다. 증오와 분노, 그 뒤에 붙는 용서와 이해. 단어만으로도 간극이 큰 감정들이 너무 쉽게 잊히고, 너무 쉽게 서로를 덮어버린다. 그리고 그 중심에 영희가 서 있다. <죄 많은 소녀>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보통의 속도로 죽음을 향해 걷는 영희, 그 주변을 빠르게 스치는 감정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스크린 밖의 어른들은 영희와 함께 그 소용돌이 가운데서 걸어야 한다. 나 또한 검은 상복을 입고 장례식장을 들락거리는 감정들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그 모든 것들을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


After My Death.

<죄 많은 소녀>의 영어 제목. 오히려 원제보다 이 이야기가 다루고자 하는 면이 더 잘 담겨 있다. 경민과 영희가 죽음을 향해 걸어가기까지, 이들을 둘러싼 세상은 과장되고 작위적인 영화 속 이야기라고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그렇게 잔인하게 말하고, 비열하게 바뀌는 것이 이 세상의 감정이고 우리들의 이야기다. ‘산 사람은 살기 위해서는’ 쉽게 잊어야 한다. 이후에 남는 결론이 결국 죽음이라 해도 말이다.


영화는 단순히 실질적인 죽음만을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이야기 속의 경민의 부모, 학교 사람들, 주변 친구들 등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각각의 감정적 죽음을 보여준다. 살아 있어도 이 모든 감정 앞에서 너무 쉬워졌다면, 분명히 이전에 진작 죽어버린 감정들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결국, 그 또한 다른 의미에서는 죽음이다. 어딘가 한쪽은 곪아버린 채로 서로에게 달려들고 밀려나기를 반복하는 인물들의 모습. 믿고 싶지 않아도 직시해야 하는, 과장 하나 없는 지극히 현실적인 현실이다.


아쉬운 지점 또한 존재한다. 예민함과 불안정함, 이를 다른 감정들과 함께 휘몰아치듯 그리는 방식은 자칫 ‘여자 아이들의 특성’ 혹은 ‘충동’으로 느껴진다. 기존 영화에서 봐왔던 것보다는 세심하고 넓게 그려냈다고 할지라도, 경민과 영희, 한솔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방식에서는 그 한계를 완벽히 탈피하지 못한 느낌이다. 이야기의 속도가 그렇다 해도, 이들의 숨겨진 이야기 또한 그저 ‘그 시기 아이들의 그렇고 그런 감정’으로 끝내야 했을까. 많은 것들을 과감하면서도 치밀하게 담아낸 영화이기에, 아이들의 심리 묘사는 더 아쉬운 의문으로 남는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 많은 소녀>는 의미 있는 묵직한 힘을 가진다. 이는 그보다 앞선 하나의 인간으로서 중심에 서 있는 영희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는 수화라는 낯선 언어로 시작해, 이 언어를 설명하는 익숙한 자막과 함께 끝을 맺는다. 타인에게 전달되는 말이라는 도구처럼, 인간이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 또한 그렇지 않을까. 인간은 어렵고 복잡한 감정들을 너무 쉽게 생각해버린다. 그렇게 다뤘을 때의 결과를 다 알면서도 말이다.


이렇다 말할 틈도 주지 않은 채, 그렇게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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