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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린 아니고 기린 Aug 01. 2019

연극, 킬 미 나우(2019) +

아이스크림


*


“혹시 아이스크림 좋아해요?”


자기가 생각해도 황당하게 들리지만 일단 친구들에게 둘만의 시간이 필요해 자리를 벗어났고, 와중에 아이스크림을 두 개나 사버려서 대책이 없다. 그게 대뜸 내 옆에 앉은 여자의 첫인사였다. 조금 전에 맥주를 한 잔 마시긴 했어도 이상한 사람은 아니라는 말도 덧붙였다.


축제의 풍경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으니 문득 슬프게 느껴졌다. 거리마다 사람들이 이렇게나 가득한데, 나만 혼자만의 시간 속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내 생각을 누군가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가 내 눈 앞에 나타난 건. 그래서였을까.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내 고갯짓에 밝게 웃어 보인 그녀는 그대로 한쪽 팔을 내밀었다. 그렇게 아이스크림을 건네받고, 우리는 천천히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이 축제가 너무 좋아요.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하나 역사인 것 같아서.”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으니까. 역사라고 하니까 그렇게 느껴지네요. 좋은 말 같아요.”


그녀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생기가 넘쳤다. 거리 위 사람들이 축제의 주인공이자 역사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은 그녀야말로 그렇지 않나 싶었다. 누구보다 이 순간을 즐기고 행복하게 만끽하고 있는 사람. 나는 사실 이 축제를 즐기러 왔다기보다는, 그저 멍하니 바라 볼 풍경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조금은 부럽게 느껴졌다. 모르는 사람에게 대뜸 아이스크림을 건네는 것도, 맑게 웃는 얼굴도, '아, 좋은 사람이구나.' 하는 분위기를 가득 풍기는 것도 좋았다. 그녀와 나는 축제를 하기에 딱 좋은 날씨다, 건너편 블록에 있는 푸드 트럭 앞에 줄이 길게 섰더라 같은 시답잖은 말들을 몇 마디 더 나눴다. 그러다 아이스크림 트럭이 얼마나 멀리 있었는지 설명하던 그녀는 문득 떠오른 듯 자신의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지금쯤 화해했을 거예요. 필립이랑 올리버. 내가 제일 사랑하는 친구들인데, 둘은 나를 행복하게 해 줘요. 그래서 나도 두 사람이 행복할 수 있게 무지무지 애썼거든요. 이 아이스크림도 그래서 사러 간다고 했고. 나는 누가 나 때문에 행복하다고 하는 게 좋아요. 며칠 전에 올리버가 자기 친구여서, 나여서 고맙다고 말해 준 적이 있는데 티는 안 냈지만 엄청 감동받았어요 진짜."


"나랑 비슷하네요. 나도 나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걸 보면 '아, 오늘도 괜찮은 하루구나.' 그렇게 느껴요. 나한테도 있거든요. 친구 같은 조카. 가끔은 막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 같긴 하지만요."


나는 내 조카 조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녀는 자신의 친구들과 새로 사귄 연인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참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그녀가 문득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에이, 근데 우리 둘 다 너무 이타적인 것 같아요. 가끔은 이제 이만큼이나 노력했으니 나 먼저 좀 행복해지자!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지 않아요? 나부터 행복해져야, 나부터 괜찮아야 진심으로 주변 사람들한테 그럴 수 있는 것 같거든요.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가득하고 분명히 괜찮은 인생을 살고 있어도 가끔은 사는 게 무지 피곤할 때 있잖아요. 하루 종일 이불에 깔려 영원히 잠들고 싶은 그런 때. 표현이 좀 이상한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사실 나는 늘 괜찮아야 해서 괜찮은 사람이거든요. 집에서는 엄청 밝고 가끔은 조금 시끄럽게 굴 때도 있는데, 그게 다 가짜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나 왜 이러고 있지. 그럴 때.”


“그렇죠?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늘 괜찮아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별로라고 말하는 것도 가끔 기분 좋더라고요.”


“그런가.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나는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면서도,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서도 그 질문에 대해 한참을 생각했던 것 같다. 늘 괜찮아야 할 필요는 없다는 말에 대해.


“즐거웠어요. 즐거운 시간 보내요.”


“나도 즐거웠어요. 대뜸 미친 여자가 말 거는데 받아줘서 고마워요.”


“그렇게 생각 안 했어요. 나도 마침 혼자 조용히 있는 게 싫었거든요. 적당한 타이밍이었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웃어 보였다. 좋은 사람, 이 넓은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분명 그런 사람이었다. 헤어질 때쯤에는 어딘가 나와 닮은 면이 있을지도 모르는, 조금은 외로울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도 생각했다.


“우리 지나가다 또 만날지 몰라요. 여긴 생각보다 좁으니까.”


“그러네요. 이렇게 우연히 만나서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은 걸 보면.”


“아. 그래서 말인데, 이름이 뭐예요?”


함께 앉아 대화를 나눈 시간 치고는 늦은 질문이었다. 내가 웃자, 질문을 한 그녀도 덩달아 웃었다.


“트와일라. 트와일라예요.”


“트와일라, 예쁜 이름이네요. 나는 실비아예요.”


“당신도 예쁜 이름이네요. 오늘 고마웠어요. 우연히 또 만나요, 실비아.”


우리는 그렇게 벤치에서 일어나 헤어졌다. 그녀는 내가 길을 건널 때까지 저 멀리서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나도 몇 번 뒤를 돌아보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골목을 꺾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필립과 올리버라는 두 친구가 진작 화해를 하고 조금 어색한 공기 속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그림을 상상했다.


매 년 나는 이 축제를 바라보며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을 떠올리고, 거리를 걷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 우리가 있었으면 어떨까 하고 떠올리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우연히 만난 그녀도, 나도 남들보다 먼저 자신만의 이야기 속에서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우연히, 또다시 만날 일이 왔으면 좋을 것 같다고. 어쩌면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둘도 없는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녀가 말한 소중한 두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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