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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on Lee Apr 03. 2023

포용성에 대한 소고

가급적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 그 어디에서든.

갖춰야 할 것 중 하나

리처드 플로리다 도시경제학자는 도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기술(Technology), 재능(Talent), 관용(Tolerance)다. 이를 3T라 일컬으며, 연구에 따라 발전된 도시들은 이와 같은 요소들을 모두 갖춘 것으로 드러났다. 기술과 재능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기술을 갖춘 곳이라면 당연히 재능있는 이들이 몰려들 것이다. 역으로 재능과 기술을 두루 갖춘 인재들이 찾는 곳이라면 발전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기술과 재능은 서로가 꼭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다고도 볼 수 있다.


문제는 다른 하나다. 바로 관용이다. 다시 말해 얼마나 다양한 것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다. 즉, 포용성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서로 다른 이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인지할 수 있느냐가 도시의 발전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미 서부의 실리콘밸리가 대표적인 예다. 미 동부처럼 빡빡하지 않다. 뉴잉글랜드(미 북동부 6개주)만 보더라도 이전부터 발전된 도시답게 학력으로 우선 사람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서부는 다르다. 뒤늦게 일어선 도시들이 많고, 다양한 색채를 지닌 이들이 많다. 즉, 미 서부가 동부보다 좀 더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여건이고, 이는 곧 창의력으로 발현된다. 플로리다 박사는 이를 창조도시라 일컫는다.


도시 연구에 따르면, 성소수자(LGBT)가 많은 도시에서 창의적인 것들이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기존 다수와 다른 소수를 얼마나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곳이 곧 발전된 도시라는 것이다. 놀랍게도 양 쪽 지수가 모두 일치한다. 도시와 조직이 우리와 다른 누군가를 얼마나 포용하느냐에 따라 도시 발전의 척도에 적잖은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이만하면 기술과 재능을 갖추고 있더라도, 포용할 수 없다면 그 기술과 재능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뜻이며, 혹 찾아 오더라도 이내 버티지 못하고 떠나가기 마련이다. 이들을 얼마나 눌러살 수 있게 하는 것이 곧 도시, 지역, 조직, 국가의 발전을 말한다고 유추할 수 있다.


포용성.  우리는 얼마나 우리와 다른 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지 보면 현재 우리의 상태와 향후 발전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다. 가장 작은 집단의 주체인 개인부터 여러 조직과 지자체를 거쳐 국가까지. 궁극적으로 모든 것들은 개인들이 모여 이룬 것들이다. 개인이, 조직이, 국가가 얼마나 상대를 품을 수 있느냐가 향후 발전 여부를 장담할 수 있다. 이는 곧 우리 각 개인이 얼마나 다른 것들을 포용할 수 있느지에 대한 질문이며, 더 나아가 우리가 향후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한 번 더 말을 바꿔보면 다양성을 얼마나 많이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플로리다 박사의 말처럼 비단 도시에만 해당 되는 사안도 아니다. 개인과 국가에도 충분히 적용가능하다. 역사적으로도 이는 잘 드러난다. 우선 로마를 보자. 로마는 다양성을 대표하는 집단(제국)이었다. 상대의 장점을 흡수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냈다. 로마의 군인들이 착용하는 군복과 여러 전투장비만 봐도 이를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상대의 문화를 인정해주면서도 중앙에서는 이를 자기화해서 더 나은 문화를 창출해냈다. 이를 개인적으로는 로마의 포용성이라 표현하고 싶으며, 이것이 로마가 발전하고 더 융성할 수 있었던 경우다.


로마의 쇠락기도 보자. 로마는 테살로니카 칙령 이후에 기울기 시작한다.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면서 여타 종교를 배격하고 심지어 허용조차하지 않았다. 가장 융성했던 로마는 서서히 기울었고, 기독교의 원류를 두고 끝내 비잔틴제국과 서로마제국으로 갈라서고 만다. 이후 종교에 지나치게 골몰했던 유럽사회는 어둠의 시기였던 중세사회로 접어든다. 문화를 가장 많이 꽃피웠고 향유했던 유럽이 로마 이후 신만 중요시하는 철저히 폐쇄적인 사회로 이어진 것이다.


스페인도 마찬가지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아갈 즈음 스페인은 지나칠 정도로 천주교를 신봉했다. 결국 천주교도들을 제외한 이교도들을 모두 국외로 추방했다. 문제는 이후였다. 이들이 차지하고 있던 산업군들이 모두 흔들렸고, 이를 대체해 줄 사람들이 없었다. 결국 근저에 자리를 잡았던 기초 직군들이 흔들리면서 스페인 경제가 요동쳤다. 여기에 펠리페 2세 막바지에 여러 전쟁을 치르면서 국가 재정이 어려워졌고, 설상가상으로 전쟁에서 패하면서 스페인은 급속도로 기울기 시작했다.


스페인은 이전에도 천주교 중심 국가였다. 그러나 이베리아반도에 위치한 탓에 북아프리카에서 지브롤터해협을 지나 북상한 이슬람 세력에 의해 지배당하기도 했다. 이것이 곧 스페인의 다양성, 즉 포용성으로 이어졌다. 반강제적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었던 다양성은 스페인이 여타 유럽 국가들과 다른 사고를 하는데 발판이 됐다. 그러나 이슬람 세력을 몰아냈고, 스페인 왕정이 지나치게 한 곳만 집중하면서 스페인은 뿌리부터 거세게 흔들렸다. 결국 유럽내 다른 나라도 갖고 있지 않던 다양성이 실종됐고, 획일화에 골몰하면서 15세기를 주도했던 스페인은 뒤로 물러나게 됐다.


예는 도처에 넘친다. 미국을 보자.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에 출발했고, 이후 이민자들을 적극 수용했다. 이민자들이 기존 미국인들이 하지 않는 일을 대체하면서 경제가 부양이 됐다. 그 와중에 숱한 인종차별이 있었지만, 경제적으로는 미국이 보다 더 탄탄해지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미국으로 향하는 이민자들은 '아메리칸드림'을 꿈꿨고, 이들이 허드렛일을 담당하면서 미 경제가 제대로 이행될 수 있었다. 발전된 국가에서 드러나는 측면으로, 받아들인 이민자들이 자국의 취약 산업군에 종사하면서 미국이 인종의 다양성을 넘어 산업의 다양성으로 자리할 수 있었다.


국가에 대한 예가 너무 많았다. 이제 도시를 보자. 아까 언급하다만 미국의 동서부를 비교해봐도 어렵지 않게 결과물을 도출할 수 있다. 동부가 명문대 중심의 학력 중심 사회를 구성한 사이 서부에서는 다양한 사고가 꽃을 피웠다. 이는 도시와 지역이 태동할 때부터 어쩔 수 없는 사안이다. 주(State)의 규모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동부는 일찌감치 영국인들부터 살았던 곳인 만큼 영토가 작다. 즉, 여지가 없고 건물이 빼곡하다. 이에 반해 서부는 넓은 권역을 자랑하고 있다. 건물들은 널널하게 자리를 잡았고, 유현준 교수(홍익대학교 건축학과) 말처럼 저층이 많다. 이를 통해 다양한 사고를 수립했다. 각 지역과 주들은 이를 포용한 셈이 된다.


이를 종합해 보면 기저에 자리한 문화적 요인들이 결국 얼마나 포용할 수 있는지로 이어졌는지 알 수 있다. 이제 대한민국을 보자. 대한민국은 얼마나 포용적인 사회인가.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다. 1997년 경제위기 이후 포용성은 사라졌다. 가뜩이나 관계가 중요한 사회에서 나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이종으로 취급받거나, 유별나거나 독특한 대상이 됐다.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어느 조직에서도 손을 들고 이야기하면 '나댄다'부터 '별꼴'이라는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이만하면 포용성은 찾아볼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성장은 거듭했지만, 다양화보다는 획일화를 추구했다. 남들과 같지 않으면 패배자이며, 실패자가 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 결과 여러 곳에 위치한 인재들은 획일화된 시각에 의해 빛날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각 개인이 다양한 개성을 지니고 있지만, 이미 학습된 모양으로 재조각되는 사회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특히 대기업을 보면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즉, 대한민국에서 표용성을 자랑할 수 집단은 대한민국 자체부터 기업체와 대학까지 찾아보기 어렵다. 같은 공간에 갇혀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질문하면 이상한 사회에서 창의성을 갖춘 인재가 나올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되물어 볼 일이다. 오히려 창의적인 사람이 나오는 것이 더 이상할 정도다.


유 교수는 최근 교도소와 학교 그리고 양계장을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한 바 있다. 대한민국에서 성장하면 핀란드의 착한 어린이도 중2병에 걸릴 수 있으며, 금세 창의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 말하고 있다. 이처럼 대한민국은 포용성 이전에 거론할 수 있는 다양성이 철저하게 결여되어 있다. 남들과 같은 속도가 아니면 이미 낙오자다. 그 이전에 기성 세대들이 이를 기다리지 못한다. 그래서 자녀들을 닥달한다. 기성세대가 재단한 교육제도는 산업시기의 역군이 되는, 다시 말해 부품이 되는 것이 곧 성공인 사회에서 주효한 것이다. 개인의 행복따위는 별로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그 교육제도를 뚫고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전혀 쓸 때 없는 토익을 공부해 입사지원에 나서야 한다. 그래놓고 영어를 못한다부터 요즘 애들은 배가 불렀다고 이야기 한다.


포용성을 떠나 하위 개념인 다양성만 이야기하더라도 다양성이 갖춰질려면 어른들이 귀찮아야 한다. 하지만 귀찮길 원하는 어른은 없다. 답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서양의 어머니들이 답을 찾길 기다리는 사이 동양의 부모들은 답을 종용한다. 비약적인 예지만 과정이 없다. 결과 지상주의가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과정이 없이 결과만 중요한 것에서 다양성은 더더욱 만들어낼 수 없으며, 다양성이 존재할 수 없다보니 다른 누군가를 포용할 여지는 더더욱이 없다.


그래서 대한민국에는 수도권으로 많은 이들이 몰리는 것이다. 지방에서 직장을 구하기 어려운 것이 결정이지만, 다른 면을 볼 필요가 있다. 자기가 나고 자란 고향에서는 많은 간섭을 받기 일쑤다. 이웃들의 쓸 때 없는 견제부터 사소한 관심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는 간섭까지. 살아보지 않아놓고서는 먼저 좀 살았다는 이유로 서슴없이 훈수라는 화살을 마구 던져댄다. 그러나 서울은 다르다. 어차피 타지에서 온 모두가 모인 곳이라 서로가 모른다. 즉, 서울에는 지방의 여느 도시가 갖고 있지 않은 익명성이 존재한다. 다양성을 추구하긴 어렵지만 최소한의 여지인 익명성을 갖고 있다. 그 익명들이 모여 다양을 추구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 다양성도 결국 고시, 공무원, 공기업, 대기업 지원이 대부분이지만 말이다.


개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 지평이 넓은 지를 보면 그 사람의 포용성을 인지할 수 있다. 대개 마당발인 친구들은 포용성을 갖추고 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성격과 상대의 말을 들어주는 성격까지. 꼭 마당발이 정답이고 좋다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이들은 자기 사고에서 나름의 포용성을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들이 공부를 통해 식견을 갖추고 경험과 독서를 통해 넓은 시야를 갖추는 것은 곧 넓으면서도 깊은 포용성을 지니고 있고, 다양한 사람과 여러 분야의 대화를 통해 관계 개선에 용이하다는 뜻이다.


꼭 관계 문제가 아니더라도 자기의 방향을 설정함에 있어서도 다양한 사고를 할 수 있다. 무조건 공무원만 준비하는 것이 아닌, 꼭 실패하더라도 다른 방법을 찾고자 애를 쓸 수 있다. 그러나 다양성을 넘어 사고의 포용성이 적은 이들은 선택의 폭이 줄어든다. 그렇기 때문에 사고의 다양성을 떠나 우리 자체가 얼마나 다양성을 넘어 특정 지식과 상황, 더 나아가 다른 이들까지 얼마나 포용할 수 있는지, 포용은 못하더라도 다양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는지 자문해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또, 다른 누군가를 판단함에 있어서도 좋은 잣대가 될 수 있다.

포용성에 가까운 사람이, 엄청난 포용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에 가까울 확률이 높다. 쉽게 말하면, 상대와의 마찰이 있더라도 자신의 탓을 인정하고 반성할 수 있는 사람이 포용성이 있는 사람이다. 이마저 거절하고 사과할 줄 모르는 이는 포용성은 커녕 다양성조차 지니고 있지 않은 이일 확률이 높다. 일전에 윗사람에 대한 정의로 '베풀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한 것도 일맥상통하고, 강자와 약자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부딪힘에 얼마나 포용할 수 있는지가 그 사람의 깊이와 너비를 알 수 있는 가장 큰 척도이며, 향후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 될지 기대할 수 있다.

보다 확고부동한 사실은 애석하지만 대한민국에서 포용성을 찾긴 불가능하며, 그 씨앗을 심는 것조차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양한 사고를 잉태하고 싶은 유망주들이 대한민국을 '지옥'이라 표현하는 것이라 스스로는 이해하고 있다. 획일화된 가치관, 한곳으로만 가야 성공하는 사회에서 포용성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인생은 트랙에 놓인, 혹 마라톤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다. 꼭 경쟁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존재하며,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유 교수의 말처럼, 양계장에 사는 닭은 독수리가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끝으로, 우리가 속한 도시와 스스로가 얼마나 다양성을 존중하고, 그 이상의 포용성을 지니고 있는지 물어볼 일이다.


(2018. 12. 10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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