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가 방구석에서 영어를 익히는 법.
"머리가 굳어서 이민 오니깐 아무리 오래 살아도 영어는 제자리야"
"이제는 영어도 못하는데 한국말까지 안되네?"
이민자들이 가장 자주 하는 푸념 중에 하나다.
시건방진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나는 이 말에 참 반감이 생겼더랬다. 오케이, 영어가 안되는 건 그렇다치고 한국말이 안되는 건 도대체 이유가 뭔데?
이삼십년을 넘게 살아도 늘지 않는 영어실력이 창피해서 별 문제 없어 보이는 본인의 한국말 실력까지 마음에도 없는 타박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것은 마치, 영어 스펠링은 틀리면 무지 창피해하면서 한글 맞춤법 틀리는 것에는 별로 타격감이 없어보이는 형국이랄까?
딱 한번 반대의 경우를 본 적이 있다.
내가 "영어를 참 잘 하시네요" 하고 칭찬하니 상대방은 "그래도 한국말만 하겠어요? "라고 화답했는데,
그 모습이 뭔가 신선하고 멋있었다.
여하튼 나는 훗날,
"이민와서 영어는 확실히 많이 늘었고 한국말 역시 녹슬긴 커녕 더 견고해졌어!"
라고 스스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노라.. 가 이민 초기의 각오였다.
허나 나는 시험이라도 치는게 아니라면 굳이 각잡고 공부하는 타입이 아니다.
이곳에서도 비장한 각오와는 달리 딱히 영어실력향상을 위해 하는 노력은 0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나다에서의 십 년 동안 나의 영어실력은 꽤 많이 향상되었다고 본다.
내가 하는 영어를 듣고 "저자는 한 고등학교 때 쯤 캐나다에 왔나보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이처럼 내 영어가 진짜 실력에 비해 고평가되는 이유는 내가 영어소리를 꽤 그럴 듯하게 낼 줄 알기 때문이다.
개그맨이나 배우 중에 출신과 상관없이 외국어 또는 사투리를 네이티브처럼 구사하는 사람이 있듯이,
나도 어릴적부터 원숭이처럼 누군가의 소리의 특징을 잘 잡아 흉내를 잘 내는 편이었다.
서울 토박이지만 외가가 전라도이고 친가가 충청도인 나는 양 사투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편이다.
반면 유창성은 그럴싸한 소리에 비해 무척 수준이 떨어지는 것이 고민이다.
이야기가 잠깐 딴데로 샜는데, 여하튼 유학이나 어학연수경험이 전무한 한국 토박이가 30대 중반에 이민와서 이룬 것 치고는 꽤 준수한 성장이었다고 애써 자위하고 있다.
여느때 처럼 서론이 길었다.
그렇다면 거짓말 조금 보태, 짜장면 집에 전화하면 "네~ 진짜루입니다" 하고 받을 정도인 밴쿠버에서,
중학교 때 유학 와도 한국친구들하고만 어울리다가 이민자 영어를 면치 못한다는 이 땅에서, 그동안 나의 영어실력향상에 도움이 되었던 경험이 뭐가 있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이민 초기에 했던 프랜차이즈 레스토랑 알바 : "For here? to Go?" 만 골백번씩 하는 햄버거집에서 무슨 영어가 늘겠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실제로 영어실력이 향상된다기 보다는 원어민에 대한 두려움이 한결 해소된다. 쟈들도 나와 같은 사람이고 햄버거 메뉴나 감자튀김, 음료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공통의 화제만 있다면 원어민과 나름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자신감이 생긴다.
Jop Interview 준비 : 예상질문에 대해 스크립트를 작성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걸 달달 외우고, 그걸 또 외운티가 안나게 자연스럽게 말하는 연습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관계대명사로 확장되어 꽤 길어진 문장이 입에 붙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막말로 구직에는 실패에도 나도 모르게 훌쩍 성장한 영어 실력은 건진다.
나는 현재 이직 생각없이 잘 다니고 있는 직장이 있지만, 가끔은 다른 회사에 면접을 보려고 한다. 면접 결과와는 상관없이 그 과정 자체가 내게 주는 성장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 쇼핑 : 나더러 CNN 뉴스 해독을 해라, 미드를 쉐도잉해라 하면 그 집중력이 5분도 채 못 갈것이 뻔하지만, 아마존 쇼핑창의 리뷰는 자발적으로 몇십개이고 읽는다. 온라인 구매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리뷰이다. 그래서 되도록 많인 리뷰를 읽으려고 하고 다행히 리뷰 읽는 것을 재미있어 하는 편이다.
그 과정에서 아마존 리뷰야말로 민초들의 살아있는 영어의 장이라는 것을 체득하였다.
지마켓이나 쿠팡에서의 상품 구매 후기를 떠올려보자.
"저는 이 육절기를 구입할 때 가격과 크기로 인해 무척 고심했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무척이나 만족스럽군요. 이 물건으로 인해 당신은 상당한 고기값을 절약할 수 있고 제 배우자도 저에게 탁월한 선택을 했다고 치하합니다. 저라면 어느 누구에게든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추천할 것입니다" 식의 어색한 표현이 아닌, 정말 이웃집 아줌마들이 대화하는 듯한 구어체로 작성을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비싸기도 하고 부엌에 자리도 많이 차지할 것 같아 걱정했었는데 웬걸요? 생각보다 아담해서 자리도 많이 안 잡아먹고 식비절약에도 도움이 되요. 남편도 저더러 잘 샀대요. 강추합니다." 이런식이다.
바로 이런 자연스러운 어투와 표현을 아마존 리뷰에서 볼 수 있다.
리뷰..즉 상품평이란 것은 우리의 생활과 너무나 밀접해서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사전을 찾아볼 필요도 없이 머리가 아닌 감각을 통해 피부로 와닿게 된다. 또한 중등수준의 영단어와 문법만으로도 못하는 말이 없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을 만큼 사람들은 그닥 유식하게 말하지 않는다.
"...the box I ordered had an expiration date of January 2023."
: 물건의 유통기한이 얼마다...라고 표현할 때 have 동사를 쓰니깐 be 동사보다 뭔가 있어보인다.
"her stool firmed up in a day,"
: stool에 똥이라는 뜻도 있네. '똥'을 '변'이라고 점잖게 부르듯이 poop의 좀 더 얌전한 표현인가보다.
설사가 좋아졌다는걸 'firmed up'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initially thought that these were not going to be any good,.."
: initially thought 는 뭔가 세련되 보이니 꼭 한 번 써먹어 봐야겠군.
"11 fits perfectly without being squished or too roomy"
: 신발이 너무 꽉끼거나 헐렁하다는 걸 저렇게 말하네
"but nothing to stop me from wearing these."
: 계속 입고(신고) 싶어, 또는 요즘 계속 이것만 신쟎아... 라고 이야기할 때 "I want(like) to..."에서 탈피할 수 있겠다.
등등... 이렇게 때려맞추기 식으로 자연스럽게 다소 구어적인 영어를 익히게 된다.
아마존 영어(?)가 매력적인 것은 이것이 '어학공부'라는 생각을 전혀 안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냥 나는 온라인 쇼핑을 했을 뿐인데, 얼굴도 모르는 아줌마들이랑 상품 진열대 앞에 서서 몇마디 주고 받은 느낌이 든다.
먹었으면 싸버려야 건강에 이롭듯이, 인풋이 있으면 아웃풋이 있어야 발란스가 맞는다.
온라인 쇼핑을 하며 틈틈히 줍줍한 표현을 동원하여, 나도 구매한 상품에 대한 리뷰를 작성해보거나,
아니면 잠재 구매자들이 상품에 대해 던지는 질문에 답을 해준다.
아마존 영어의 확장판으로 맛집 영어가 있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yelp같은 식당 추천 어플에서 맛집을 찾아 헤메면서 줏어먹은 표현들로 나도 내가 갔었던 식당에 대한 리뷰를 작성해보는 것이다.
아마존도 그렇고 이런 류의 리뷰에 대해 사람들이 '좋아요'를 누르면 그게 또 그렇게 모티베이션이 될 수 없다.
어느 날은 컨디션이 좀 좋다 싶을 때 그동안 눈으로만 읽던 리뷰를 소리내어 읽어본다. 교과서 낭독하듯이 읽는게 아니라 최대한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듯 생동감 있게 읽는 것이 포인트이다.
물론 쇼핑이 뜸하거나 맛집 탐방이 뜸하면 이런식의 마구잡이식 시장통 영어공부도 한동안 정지된다.
괜챦다. 내가 무슨 학생도 아니고 매일매일 30분씩 꾸준히 같은 건 내 사전에 없다.
중요한 건, 그래서 이런 자질구레한 영어공부의 껀수(?)를 되도록 일상에 많이 심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하나가 시들해지고 중단이 되더라도, 다른 별 시답쟎은 활동이 어학의 불씨가 꺼지지 않게 살살 부채질을 해 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다 또 아는가? 언젠가는 마을 도서관에서 주최하는 무료 독서 토론 클럽에라도 합류하게 될 지 말이다.
나이 40줄에 그 정도면 어디가서 "나 지금 캐나다에서 어학연수 중이여 허허허" 하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