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숨이 멎을 듯한

피레네의 일출

by 그린망고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여러 갈래가 있다. 그중 가장 대중적인 루트가 프랑스의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출발해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이르는 프랑스길이다.


프랑스길의 첫 여정은 피레네로 시작된다. 피레네는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 걸쳐 있는 산맥으로, 순례자들은 첫날 혹은 이튿날 고도 1,450m에 달하는 레포에데르 고개(Collado de Lepoeder)를 넘게 된다.


하루에 피레네를 넘어 스페인의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까지 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첫날부터 무리하고 싶지 않은 나 같은 사람들은 피레네 중턱의 산장에서 하루를 머물기도 한다.


가파른 절벽이나 암릉은 없었지만, 오르막이 끝도 없어 폐활량이 형편없는 나에겐 꽤나 버거운 여정이었다.


그럼에도 입에서는 연신 감탄사가 나왔다.


“아, 너무 아름답다. 행복하다.”


상투적이고도 옹색해 빠진 나의 어휘력이 참으로 안타까운 순간이다.


피레네의 풍경은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모르핀만큼 압도적이었다. 육신의 고통 따위는 일순에 날려버릴 정도로.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야생의 풀과 꽃들, 그 위에서 다소곳이 풀을 뜯고 있는 양 떼를 보고 있자니 뇌와 심장이 투명해지는 기분이다. 모든 생명이 주어진 수명 대로 평화롭게 살다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잠시 해 본다.


놀멍쉬멍 3시간을 조금 넘게 걸으니 산장이 보인다. 피레네의 절경이 내려다 보이는 산장 카페에서 또르띠야(스페인식 오믈렛)를 먹으며 숨을 돌린다.


체크인을 하고 입고 왔던 옷가지를 조물조물 빨아 볕이 한가득 내려앉은 뒷마당 빨랫줄에 가지런히 널어놓는다. 방에 들어와 창밖을 보며 빈둥대는데, 구름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다. 별안간 하늘이 쪼개질 듯 천둥이 치더니 폭우가 쏟아진다.


‘앗, 빨래!’


부리나케 달려 나가 보지만 이미 물을 흠뻑 먹었다. 물기를 꼭 짜 내고 비가 들이치지 않는 곳에 탁탁 털어 널었다. 평소 같았으면 몹시 궁시렁대었을 이런 순간들 마저 순례길에선 마치 무성영화의 슬로모션 장면처럼 낭만이 넘친다.


저녁엔 순례자들이 다 함께 식사를 하며 순례길을 찾게 된 저마다의 사연을 나눴다. 내향형 인간인 나에겐 숨고 싶은 시간이었지만, 어디서 또 이런 경험을 해보겠나 하는 생각으로, 풋내기 배우가 대사를 내뱉듯 다소 어설프게 나의 이야기를 전했다.


잠자리에 드니 9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다.

그리고 눈을 뜨니 아침이다. 언제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숙면을 취했다. 매일밤 나를 괴롭히던 불면이 오늘은 찾아오지 않았다. 순례길 만세다.


아침 식사 시간이 7시라 그전에 여유가 좀 있다. 산책을 해야겠다. 문을 열고 나서니 청량한 공기가 콧속 깊숙이 스며든다. 가슴으로 신선한 들숨이 가득 들어온다. 폐가 팽창되는 듯하다.


첩첩이 쌓인 능선 위로 구름 그림자가 시시각각 산세의 농담(濃淡)을 바꾸어 놓는다. 자욱한 운해가 골짜기를 가득 채웠다. 저 아래 어딘가에 어제 지나온 길이 있겠지.


하늘과 맞닿은 산마루 경계로 붉은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순식간에 온 세상이 산호빛으로 물든다. 구름바다 사이로 여명이 번지더니 능선 너머로 이윽고 태양이 고개를 든다. 이름 모를 들꽃이 끝도 없이 펼쳐진 들판 위로 햇살이 쏟아진다. 풀잎에 맺힌 새벽 이슬이 프리즘이 되어 오색빛을 흩뿌린다. 태양이 한 줄기, 두 줄기 사방으로 뻗어나가 잠들었던 산과 들을 깨운다.


비현실적이다.

'숨이 멎을 듯한 아름다움'이란 이런 게 아닐까.

감사하다. 이 순간 이곳에 서 있게 해 준 모든 이유가.

차원이 다른 행복.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