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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적 허영심 Nov 02. 2024

지하에서 허영심 채우기

오른쪽 문이 열리고 2분 후엔 왼쪽 문이 열린다.

내가 움직일 시간이다.

주섬주섬 일어나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간다.


지하철은 시간을 낭비해야 하는 괴로운 공간이다.

지하에서는 날씨의 변화나 길거리 사람들을 관찰할 수도 없다.

이 공간은 서울에서도 밀도가 가장 높겠지만,

어깨를 붙인 서너 명이 무얼 하든 스마트폰으로 자신만의 공간을 지켜낸다.


책을 가지고 다닌다.

집 여기저기에 쌓인, 펼쳐 보이지 못한 책들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어서.

아니, 지하철에서의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아니다.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사람들에게 책 읽는 모습을 과시하기 위해서. 


네댓 개의 문단을 넘어갈 때마다 불안한 마음으로 고개를 든다.

때때로 타이밍을 놓쳐 어느 역인지 한동안 알 수 없을 때도 있다.

전광판이 제 역할을 하는 건지 의문이다.

나는 나의 역할을 잘하고 있는 걸까.

전광판은 집중력을 잃게 하지만 덕분에 졸음을 이겨내 다시 책에 집중하게 만든다.

전광판은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오늘도, 지금은 자정이 지났기에 실제로는 어제이지만, 얇은 책을 한 권 샀다.

지금 이 글을 써서 곧 업로드를 하는 것도 그 책과 지하철에서의 시간 덕분이다.

사실 잠을 기준으로 어제와 오늘을 나누는 게 나에겐 더 합리적인 일이다.

내가 시간을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


지하철에서 읽을 책은 얇은 게 중요하다.

가방의 무게를 줄이려, 제한시간 안에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줄이려.

두꺼운 책의 앞부분만을 간신히 읽어내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으려.


웃기게도 지하철에 사람이 너무 없으면 책을 잘 읽지 않는다.

무릎에 책을 펴놓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아도 비웃을 사람이 없기 때문일까,

내가 그들보다 잘 낫다는 허영을 채울 수 없기 때문일까.

집에서는 읽지 않는 책을 꾸역꾸역 가방에 집어넣는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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