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일기 (1)
새로운 곳에서 시작하는 생활, 그리고 아직은 낯선 학기의 시작.
스페인에서의 진정한 첫걸음을 떼던 9월을 되돌아보았다.
9월 11일. 마유코와 룸메 리카코를 초대해 함께 점심을 먹었다.
마유코와 같은 학교 동기인 리카코(理香子). 가족처럼 서로를 위해주는 모습이 인상적인 착한 친구들이다.
우리 집의 큰손 성민이가 제육볶음과 삼계탕을 만들어 친구들을 대접했다. 집에서 열린 작은 만찬. 제육볶음은 조금 매워했지만 그래도 한국 음식에 익숙한 친구들이라 이번 식사를 정말 좋아해 주었다.
서로 과가 달라서 학교에서 마주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자주 연락하고 만나자며 굳은 약속을 했다.
9월 13일. 드디어 D-day, 개강 날이다.
신기하게 수요일부터 개강이라니. 기분 좋게 제일 좋아하는 옷을 입고 한껏 깔끔하게 준비한 다음, 설렘 반 긴장 반으로 집을 나섰다.
바스크 대학교(Universidad de País Vasco)는 바스크 지방의 공립대학으로 빌바오(Bizkaia), 산 세바스티안(Gipuzkoa), 비토리아(Álava) 세 도시에 캠퍼스가 있다.
나는 공과대학 강의가 주로 이뤄지는 San mamés 캠퍼스에서 수업을 듣게 되었다.
빌바오의 자랑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페인의 축구리그 프리메라리가 팀인 아틀레틱 빌바오(Athletic Bilbao)의 홈구장과 불과 10m 정도 떨어져 있는 엄청난 접근성을 가진 건물이다.
스페인어 수업을 듣기 전 학교 식당에서 친구들과 점심을 시켜먹어 보았다. 츄러스나 빵 같은 간단한 음식들부터 햄버거와 닭가슴살 스테이크같이 나름 점심다운 식사까지 다양한 메뉴들이 있었다.
앞으로 학교를 다니면서 하나하나 파보는 걸로...
스페인어 수업은 UPV로 온 교환학생을 대상으로 열리는 언어 수업이다.
스페인에 오기 전 나름 독학으로 스페인어를 열심히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레벨 테스트에서 초급반을 배정받았다. 중급반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했어서 배정받는 순간 많이 실망했는데, 생각해보면 학생 수가 많은 초급반에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면서 여러 나라 친구들도 사귀어서 오히려 좋았던 것 같다.
첫날에 교환학생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했는데, 산 마메스 캠퍼스를 다닐 교환학생을 모아놓고 보니 한국인은커녕 동양인조차 나와 룸메 성민이 둘밖에 없어서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말로만 듣던 인종차별을 학교에서 당하게 되는걸까 별의별 걱정이 다 드는 순간이다.
나의 이번 학기 수강과목은 'Fundamentals of Materials Science'와 'Environmental Technologies'.
첫날 교실에 들어섰을 때는 뭔가 신기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아 괜히 부끄러워졌다. 다들 같은 나라 친구들끼리 앉은 반면, 나는 구석에 조그맣게 앉아 조용히 수업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왔다.
자신 있게 시작하자고 다짐했지만 막상 낯선 환경에 위축된 것 같아 나 자신이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아직은 천천히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9월 15일. Leioa 캠퍼스에서 교환학생 학기 설명회가 있다길래 캠퍼스도 구경할 겸 가보았다.
집 근처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데, 한 베트남인 남학생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산 마메스에서 스페인어 수업을 듣지 않냐며 자기도 같은 수업을 듣는다고 한다. 이름은 Tan.
알고 보니 딴도 레이오아로 설명회를 들으러 가는 길이었다. 우연찮게 같은 반 친구를 사귀게 된 나는 정말 반갑게 딴과 이야기를 나누며 버스를 탔다.
레이오아는 달랑 건물 두 채가 붙어있는 산 마메스와는 달리 대학교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큰 캠퍼스였다. 일본인 친구들이 다니는 이 캠퍼스는 빌바오 도심에서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를 가야 하는 단점이 있어서 일찌감치 이곳에서 수업 듣기를 포기했었다.
사실 설명회를 듣기보단 캠퍼스 구경도 하고 친구들과 다 같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게 주된 목적이었던 것 같다. 리카코와 함께 앉아 수업은 어떤지, 앞으로 여행 계획이 있는지, 심심하니까 셀카를 찍자던지 신나게 수다를 떨며 집으로 돌아왔다.
9월 16일. 저번에 우연히 사귀게 된 베트남 친구 딴과 다시 만났다.
우리들의 아지트 100 Montaditos에서 다른 한국인 친구들에게 정식으로 딴을 소개해주었다. 특히 오빠들과는 금세 친해져서 나중에 같이 모여 축구를 하기도 했다.
딴은 자기가 알고 있는 다른 베트남 친구도 소개해주었는데, 수준급의 영어와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Lynn이다. 린과 딴은 각각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에서 유학 중에 빌바오로 왔다고 한다.
어떻게 여러 나라에서 지내다가 우연히 빌바오로 이렇게 모이게 되었는지, 참 신기한 인연이다.
자리를 옮긴 바에서 이 지역의 유명한 와인 차콜리(Txakoli)를 맛봤다.
차콜리는 바스크에서 주로 생산되는 화이트 와인의 한 종류인데, 산도가 높고 약간의 탄산감이 특징이다.
멋진 사장님이 따라주는 차콜리의 맛은 정말... 시다. 역시 아직은 와인 맛을 모르는 무지랭이에 불과하다.
조급해하지 않고, 실망하지 말고 천천히 가자는 말을 많이 되뇌었었던 9월.
하루아침에 모든 걸 이룰 수 없듯이 누구에게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