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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망이 Jan 08. 2021

마태는 꼼꼼한 사람이었다

<마태복음>, 존 쉘비 스퐁

1. 마태가 망쳤다?
‘마태가 망쳤다’고 내심 생각했다. 아니, 몇몇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의 주장에 공감했다. 공관 복음 중 마태복음이 가장 흥미가 떨어진다고 여겼다. 날 것 같은 마가복음이나 자유로운 누가복음에 비해, 마태복음은 미리 정해진 답으로 채색된 듯 보였다. 양과 염소, 알곡과 가라지 등의 교훈은 뚜렷한 이분법이고, 현실에서 맞닥뜨린 문제들은 종말로 밀어버리는 듯했으며, 모호해서 풍성한 (원)이야기들을 지루한 교훈으로 덧칠해버린 것 같았다. 무엇보다, 예수를 너무 가뿐하게 하늘로 들어 올리는 것 같았다. ‘예수는 그리스도야’라고 힘을 주는 기록자의 강박이 땅에 발 디딘 예수와 하늘로 올라가는 그리스도 사이를 부실하게 메우는 듯 보였다. 그게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읽기를 재미없게 만드니까. 뭐가 됐든 ‘답정너’ 읽기는 재미없잖은가. 물론 내 성서학 읽기가 부실한 줄은 아는 탓에 오독일 줄 짐작은 했고, 마태복음이 교회력 본문일 때는 잘 읽어보려고 애도 썼다. 하지만 한 번 생긴 편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건방을 떨며 마태복음을 대하던 중에 스퐁 주교의 『마태복음』을 읽었다.

특별한 기대가 있었던 건 아니다. 올해(2020년) 교회력 본문이 마태복음이었고, 설교 준비 도움이나 받아볼까 하는 정도로 읽기를 시작했다. 때마침 새로 출간된 책이기도 했고. 결론부터 말하면 기대 이상이었다. 최근 읽은 신학 서적 중 가장 흥미로웠다. 스퐁의 『마태복음』은 여태껏 접한 적 없는 읽기 방식을 제안한다. 방식만 흥미로운 게 아니라 근거 역시 충실하고 타당하다. 만약 저자의 제안이 옳다면 ‘마태가 망쳤다’는 오만한 내 편견에서 벗어나 마태복음을 다시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2. 주석이 아니다.
스퐁의 『마태복음』은 주석이 아니다. 본문을 꼼꼼하게 살피고 그것의 배경이나 단어 뜻을 분석하는 일에 저자는 관심이 없다. 스퐁은 마태복음이라는 책 자체를 주목한다. 마태는(혹은 기록자는) 무슨 목적으로 책을 기록했을까. 마태복음은 당시의 역사를 기록한 책일까? 혹은 예수의 생애를 주관적인 시선으로 서술한 전기물일까? 아니면 일반적인 연구결과처럼 역사와 전기, 그리고 신앙고백이 뒤섞인 기독교 특유의 모음집일까. 전부 아니라고 스퐁은 주장한다.

그가 밝힌 바에 따르면 마태복음은 전례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특정 지역의 유대교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이야기를 유대 절기에 맞춰서, 회당 모임에서 읽기 위해 고안해 낸 예배 낭독문이다. 다시 말하면 마태복음은 회당 예배에서 사용하기 위해 기록한 책이다. 이것이 스퐁의 주장이다.

논증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스퐁은 마태복음의 형식과 내용을 분석한다. 형식을 먼저 생각해보자. 스퐁에 따르면 마태복음은 책 전체가 유대교 그리스도인 회당 모임을 위한 전례문이다. (역사적 사실은커녕 예수에 관한 전기도, 심지어 사건이나 전기에 관한 해석이나 신앙고백도 아니란 뜻이다.) 다시 말하면, 마태 공동체는 주요 절기가 되면 회당에 모여 히브리 성서 읽기를 자신들의 책(마태복음)으로 대신했다는 의미이다. 그의 주장이 옳다면, 마태복음 속 예수의 이야기는 유월절, 오순절, 신년절, 초막절, 수전절 등을 포함한 유대교 달력의 1년 주기에 맞게 구성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그렇게 구성된 예수 이야기는 히브리 성서의 절기 이해를 고스란히 담고 있어야 한다. 즉, 마태복음 속 예수에 관한 내용이 유대교 모든 절기와 세밀하게 맞물려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스퐁은 그것을 논증하는 일에 집중한다.



3. ‘마태는 정말 꼼꼼한 사람이었다.’(414)
『마태복음』은 크게는 10부로, 작게는 3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내용은 크게 둘로 구분이 가능하다. 1부(1-6장)는 밑그림이다. 스퐁은 자신의 주장으로 진입하기 전에, 마태복음을 둘러싼 배경을 설명한다. 이를테면, 책에서 공간적인 중심을 차지하는 회당의 중요성, 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유대교 교회력, 당시 마태 공동체와 유대교와의 관계, 마태복음이 가장 큰 영향을 받았을 마가복음과의 관계 등을 설명하는 데 치중한다.

예로, 스퐁에 따르면 마가복음 역시 유대교 그리스도인들의 회당 예배를 위한 전례문이지만, 신년절부터 유월절까지 만을 위한 문서였다. 쉽게 말하면, 6개월짜리 분량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전례문을 1년 읽기로 확장해야 할 필요를 느껴 기록한 회당 전례문이 마태복음이다. 즉 마태복음은 1년용 확장판 전례문이다. 마가복음의 서사 방식을 대부분 따르면서도, 1년 읽기를 위해 내용을 확장한 전례문이 마태복음이라는 것이다.

물론 아무렇게나 추가했을 리는 없다. 두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모든 이야기는 히브리 전통을 드러내야 한다. 예수가 한 말과 행동, 그를 둘러싼 기록은 토라 전통을 담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읽기 자체가 유대교인들이 안식일 회당에서 1년 주기로 토라를 완독하던 전통을 좇은 방식이었을뿐더러, 그들의 정체성은 여전히 유대교 그리스도인이라는 독특성을 지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1년 읽기를 위해 내용의 구조가 섬세하게 짜여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유월절에서 오순절까지의 7주 동안 맞춰 읽을 내용의 가짓수가 정확해야 하며, 해당 내용이 끝나면 다음 절기에 알맞은 내용이 나와야만 한다. 엄청 꼼꼼해야 한다는 뜻이다.

4. 스퐁의 논증
밑그림을 끝내고 나면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한다. 나머지는 전부 논증이다. 논증 방법은 단순하다. 마태복음의 서사를 따라가며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중 흥미로운 내용을 두 가지만 소개한다.


(1) 내용 측면에서의 논증 : 요셉
마태는 요셉을 실존인물로 보지 않는다. 마태가 창조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근거는 두 가지다. 첫째, 마태복음 이전까지 그 누구도 요셉을 예수의 직계가족으로 언급한 적이 없다. 둘째, 탄생 이야기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요셉은 사라진다. 다시 말해, 요셉은 탄생 이야기를 위해 기록자가 창조한 인물이라는 것이 스퐁의 주장이다. 왜 그래야 했을까.

스퐁에 따르면, 메시아에 대한 유대민족의 기대 중 하나는 분열로 얼룩진 이스라엘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이었다. 마태는 족보와 탄생 이야기를 통해 예수에게 그런 역할을 부여한다. 마태가 제시한 족보는, 유다 지파와의 연결성을 통해 다윗의 혈통성을 잇는 남쪽 유대와 연결함으로써, 정통성을 획득하려고 한다(물론 족보가 그런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는 반쪽짜리다. 마태는 라헬의 아들 요셉이 필요하다. 그가 북쪽 지파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마태는 예수를 지키고, 보호하는 아버지의 역할을 요셉에게 부여함으로써 빈 절반을 메우려고 한다. 그 증거로 마태는 족보 속 요셉의 아버지의 자리에 야곱을 데려다 놓는다. (누가복음이 요셉의 아버지 자리에 엘리를 데려다 놓는 반면) 즉 마태는 예수가 유다의 혈통을 따르게 한 동시에, 요셉의 보호를 받게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요셉은 ‘꿈꾸는 자’다. 요셉은 꿈을 통해서만 마리아의 잉태 소식을 듣고, 이집트로 피신하라는 경고를 듣는다. 꿈꾸는 자라는 별명을 지닌 창세기 속 요셉처럼 말이다. 더구나, 창세기 속 요셉이 이스라엘을 이집트로 이끌어내서 구원을 얻는 것처럼, 마태복음 속 요셉 역시, 예수를 이집트로 피신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것을 우연이라고 볼 수 있느냐고 스퐁은 묻는다.

(2) 형식 측면에서의 논증 : 십자가 사건
스퐁은 십자가 사건마저도 사실을 기록한 내용이라고 보지 않는다. 근거를 살펴보자. 스퐁에 따르면 십자가 사건은 유월절에 맞춰 읽도록 기록한 예배문이다. 유월절 회당 모임의 특징은, 24시간 철야다(오순절에 읽는 산상수훈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십자가 사건은 24시간 읽기에 적합해야 한다. 과연 그럴까? 스퐁을 계속 따라가 보자. 오순절이나 유월절 같은 24시간 철야는 3시간마다 한 주제를 다루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그렇다면 십자가 사건(산상수훈)은 여덟 가지로 구분되어야 한다. (스퐁은 이미 앞에서, 산상수훈은 팔복이 주제이며 뒷부분은 팔복의 주석이라고 논증한 바 있다.)

“마태는 24시간 철야 예배를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저녁때가 되어서,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아 계셨다.’”(384) 저녁때라는 말은 오후 6시를 가리키며, 이는 당시 시간 기준으로 하루의 시작을 뜻한다. 유월절 식사는 보통 3시간 동안 지속된다. 그럼 9시. 예수는 제자 몇을 겟세마네 동산으로 데리고 간다. 이 이야기는 ‘나를 넘겨줄 자가 가까이 왔다’는 말로 끝난다. 두 번째 순서가 끝났다. 때는 12시. 배신자 유다와 통치자들의 어두운 거래 이야기가 다음 세 시간 동안 진행된다. ‘그가 사형을 받아야 한다’는 말로 세 번째 순서도 막을 내린다. 새벽 3시. 통상적으로, 새벽 3-6시를 ‘닭이 울 무렵’이라고 부른다. 이때 주연은 베드로다(닭인가?). 동이 트기 전, 닭이 한 시간에 한 번씩 울 때마다,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한다. 새벽 6시. ‘새벽이 되어서’로 시작하는 27장의 주인공은 빌라도다. 재판 뒤 예수가 십자가 못 박힌 시간을 마태복음은 ‘제 삼시’로 말한다. 제 삼시는 오전 9시를 뜻한다. 다섯 번째 순서가 끝났다. 여섯 번째 순서는 예수에 대한 조롱이다. 이제 12시 정오. 일곱 번째 순서에서 마태는 ‘제 육시(12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다.’라고 기록한다. 어찌하여 자신을 버렸느냐는 외침 끝에 예수는 숨을 거둔다. 일곱 번째 순서 끝. 마지막 여덟 번째 순서는 다음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까지, 즉 오후 6시 전까지 예수의 시신을 거두는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유월절 맞이 24시간 철야가 끝났다. 이것이 스퐁의 논증 방식이다. 나는 대단한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5. 유대교를 모르는 이방인들의 이단적 읽기: 문자주의
이와 같은 논증을 통해 스퐁이 주장하는 바는, 내용과 형식 등 모든 면에 있어서 마태복음이 유대교를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이다. 그의 주장이 옳다면, 마태복음을 문자적인 사실로 읽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 틀을 짜는 일은 오독이고, 왜곡이다. 회당, 안식일, 토라, 절기 등 유대교적 배경 없이, 마태복음을 문자 그대로의 사실과 역사, 전기 등으로 받아들인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 동떨어진 이방인들이 만들어낸 이단에 불과하다고 스퐁은 강력하게 주장한다. 스퐁이 겨누는 표적은 분명하다. 문자주의다. 그것은 비단 오늘날의 근본주의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이방인은, 문자를 사실로 읽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를 꼴 지은 모든 이들이다. 그렇게 틀지어진 그리스도교다. 어긋난 정도가 아니라 아무런 상관없는 장소에 가 있기 때문이다.

6. 명사수 스퐁
스퐁은 곁길로 새는 법이 없다. 그는 표적을 세우고, 잘 겨눈 다음, 살을 날린다. 그것만 한다. 명중,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수많은 정보를 어떻게든 풀어놓고 싶은 욕망을 이기지 못해 곁길로 새곤 하는 학자들과 달리 스퐁은 목표점만을 향해 달린다. 책의 큰 장점이다. 그가 쓴 『마태복음』 속 모든 내용은 ‘회당 예배를 위한 전례문으로써의 마태복음’이라는 목표 지점만을 향한다. 스퐁은 반복을 두려워하지 않고 몇 번이고 자신의 논지를 반복한다. 우직하다 못해 질릴 정도다. 덕분에 독자는 저자의 주장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존 쉘비 스퐁, 1931~ )


번역도 좋다. 쉽지 않은 내용임에도 가독성이 좋다. 유대교 절기 같은 낯선 주제를, 편안하고 가까운 언어로 다룬다. 스퐁과 번역자 모두 쉬운 문장을 쓴다는 인상을 받았다. 꽤 까다로운 신학서적인데 문장은 에세이스럽달까.

내용 역시 신선하다. 최근 읽은 ‘한기연’ 책 중 가장 재밌다. 짧은 내 독서량 탓이겠지만, 이런 방식으로 마태복음을 읽는 책은 처음이다. 새로운 인식과 읽기를 제공해주는 책은 언제나 반갑다. 기꺼이 일독, 이독을 권한다.



37. 서평: 『마태복음』 / 존 쉘비 스퐁 / 2020 / 한국기독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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