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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망이 Feb 12. 2021

우리 바울은 그런 사람 아니에요

<첫 번째 바울의 복음>, 존 도미닉 크로산 & 마커스 보그

1. 우리 바울은 그런 사람 아니에요
마커스 보그와 존 도미닉 크로산이 함께 쓴 『첫 번째 바울의 복음』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우리 바울은 그런 사람 아니에요!’ 정도가 아닐까. 두 저자는 바울의 변호사를 자임한다. 바울에 관한 케케묵은 오해와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바울을 향한 따가운 비판으로부터, 두 저자는 바울을 건져내려고 한다.

(1) 케케묵은 오해는 종교개혁적 시선을 뜻한다. 이를테면 루터에게서 비롯한 행위와 믿음의 관계, 죄와 칭의 등을 교회는 오랫동안 오해해 왔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가령 바울에게 의는, 루터에게서 비롯했고, 기독교 일반이 이해하고 있는 내용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가 바라지 않은 종교 혹은 교회를, 바울이 창안했다는 주장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박이기도 하다. (2) 바울을 향한 따가운 비판은, 그가 성차별주의자이며, 노예제를 지지하고, 체제에 순응하라고 말하는 등, 혐오와 차별의 온상이라는 내용이다. 이런 비판에 대해 저자들은 바울도 시대의 자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변호를 택한다. 저자들에 따르면 도리어 바울은, 자신이 비판받은 내용들에 순응하는 일은, ‘세상의 지혜’를 따르는 것 일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과는 무관하다고 일관하게 말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오해와 비판으로부터 저자들은 바울을 변호하려고 한다. 바울 변호를 위해 두 저자가 선택한 논증 방식은 ‘진짜 바울’ 찾기다. 가짜 바울이 있다는 얘기다. 두 저자는 내로라는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답게, 흥미로운 방법으로 역사적 바울 찾기를 시도한다. (역사적 바울 구성하기가 더 어울리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우선, 흔히 바울 서신으로 알려진 13개의 편지 중, 6권은 바울의 편지가 아니라고 두 저자는 말한다. 새롭지는 않다. 저자 논쟁 역시 케케묵은 주제니까. 저자 논쟁에 관해 나는, ‘에베소서가 바울의 편지면 어떻고 또 아니면 어떤가?’ 정도로만 생각했다. 어차피 신약성서라는 묶음으로 읽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저자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진짜 바울과는 달리 지나치게 보수적이거나, 반 바울적인 편지들이 바울과 기독교를 오해하고 왜곡하게 했다고 그들은 지적한다. 정리하면, 서신서 속 바울은 급진적인 바울(진짜 바울), 보수적인 바울, 반동적인 바울로 나눌 수 있는데, 급진적인 바울이 쓴 편지는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후서, 로마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등 총 7권이다.

두 저자는, 앞서 말한 일곱 편지만이 바울의 저작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그것들을 1차 자료로 삼아 논증을 펼쳐나간다. 저자 논쟁이 『첫 번째 바울의 복음』이 다루려는 주제가 아니라서 깊이 언급하지 않는 것이겠지만, 사실은 이미 확정적인 사안이기 때문에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두 저자는 일곱 편지를 1차 자료로, 바울의 여행을 기록한 사도행전을 2차 자료로 삼아, 바울을 딱딱한 교리가 아니라 생생한 이야기에 위치시켜서, 그의 삶과 신학을 재구성한다.   


2. 급진적인 바울 vs 보수적인 바울 vs 반동적인 바울
(1) 급진적인 바울 : 바울은 정말 급진적일까. 두 저자가 말하는 바울의 급진성이란 뭘 뜻할까. 그것을 밝히기 위해, 저자들은 주요한 두 가지 문제, 노예와 성차별에 관한 바울의 입장을 먼저 소개한다. 두 저자는 가장 먼저 빌레몬서를 언급한다. 그 짧은 편지가 바울에게 도망쳐 온 노예 오네시모를, 바울이 주인에게 되돌려 보낸 내용을 다루기 때문이다. 흔히 생각하는 대로, 편지는 도망친 오네시모를 용서하라는 권유를 담았을까. 주인 빌레몬에게 노예 오네시모를 책망하지 말고 잘 대우하라는 권면을 기록했을 뿐일까. 두 저자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두 저자는 빌레몬서를 주석하면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네가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오네시모를, 네 스스로 놓아주라’는 파격적인 요구를 간청과 명령을 섞어 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바울이 절묘한 수사를 사용하여, 오네시모를 자유인으로 놓아주도록 빌레몬을 압박한 편지가 빌레몬서라는 것이다. 정리하면 빌레몬서는 그리스도인 바울이, 그리스도인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동등한 그리스도인으로 대우하도록 권면한 내용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 편지라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바울은 노예제를 순순히 따른 것이 아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는’ 주인과 노예라는 차별적 구분이 없어야 한다고 믿었다.

성차별에 대한 바울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이번엔 고린도전서를 예로 든다. 가족 내 여러 사안을 다루는 7장에서 바울은, 남편과 아내에 대한 권면을 수평적이고 상호적으로 서술한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여성/남성, 남성/여성을 서술하는 방식이나, 언급 비율, 내용 등을 바울이 의도적으로 균형 잡아 서술했다는 것이다. 이는 흥미로운 지적이다. 두 저자가 바울의 편지가 아니라고 밝힌 서신서는 가족 내 남편과 아내를 언급하는 비율이나 방식이 고전 7장과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자들의 모임 내 발언이나, 사도직에 있어서도 바울에게 남녀는 차이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흥미롭게도 바울은 유니게라는 여성에 대해 ‘사도들 중에도 탁월하여’라는 말을 남겼는데, 그 언급이 부담스러웠던 교회는 오랜 시간 동안 유니게가 유니아누스라는 남성을 간략하게 줄여 부른 이름이라고 말해왔지만, 이는 우스운 억지 주장이라는 것이다. 당시 고대 세계에 유니아라는 여성의 이름은 250명이 넘게 발견되지만, 유니아누스라는 이름을 유니아로 부른 경우는 한 차례도 없었다고 두 저자는 단언한다.

(존 도미닉 크로산, 1934 ~ 현재)

(2) 보수적이며 반동적인 바울  
두 저자에 따르면, 바울이 쓰지 않은 골로새서나 에베소서에도 노예제와 가부장제에 관한 언급이, 앞의 내용을 의식한 듯 나타난다. 방식은 다르다. 앞의 내용이 불편했던지 슬그머니 보수적인 목소리로 바뀐다. 우선 상호적이었던 관계들이 수직적으로 바뀐다. 윗사람이 누군지가 분명해 보이며, 복종 역시 일방향이다. 비율도 바뀐다. 내용을 불문하고, 고린도전서 7장에서 1:1이었던 비율이 3:9로 바뀐다는 것이다. 보수적인 바울이 바울에게로 스며든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가장 반동적인 바울의 예를 저자들은 고린도전서에서 찾아내는데, ‘여자는 잠잠하라’는 차별적 발언이 나오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는 바울의 서신이 분명하다고 주장해놓고, 반동적인 바울을 거기서 찾으면 어쩌자는 걸까. 두 저자는 몇 가지 근거를 들어 ‘여자는 잠잠하라’는 차별적 발언이, 후대에 삽입된 구절이라고 주장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해당 내용은 전체 문맥과 맞지 않게 느닷없이 나타나며, 고린도전서 안에서 명백한 모순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논증을 통해 두 저자는, 바울이 쓴 편지에서 그가 쓰지 않은 편지로 옮겨가면서 고의적인 바울 길들이기가 있었다고 말한다. “즉 급진적인 바울로부터 보수적인 바울과, 가짜 바울 혹은 심지어 안티 바울로 둔갑”(81)시키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마커스 보그, 1942 ~ 현재)

3. 바울 신학 개론
두 저자는 『첫 번째 바울의 복음』 앞부분에서 위 내용처럼 흥미로운 주제로 시선을 잡아당긴 다음, 바울의 신학을 재구성한다. 바울의 신학이 그의 급진적인 사상을 뒷받침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내용은, 바울이 지니는 의외성 같은 것이 그의 신학의 결과다.

『첫 번째 바울의 복음』의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4-7장은 바울의 신학을 다룬다. 솔직히 앞부분에 비해 참신한 충격은 덜하다. 일종의 ‘바울신학개론’으로 어느 정도 익숙한 내용을 다루기 때문이다. 두 저자는 로마서 등을 비교적 꼼꼼히 분석하면서 바울 신학의 핵심을 간추리고 자신들의 견해를 펼쳐나간다.  

4장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다’는 예수에게 붙은 몇 가지 호칭이(하나님의 아들, 주님 등) 유대교 자체적인 것이 아니라, 로마 황제가 스스로에게 부여하거나, 누군가에 의해 신성화된 호칭을, 바울이 전유해서 사용했다고 두 저자는 밝힌다. 설명의 이유는 분명하다. 바울은 로마로 통칭되는 제국이 아닌 세계, 삶, 방식을 예수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5장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역시 마찬가지다. 십자가와 죽음은, 제국의 성격을 드러내고 폭로한다고 말한다. “십자가는 로마제국이 예수에 대해 ‘틀렸다’를 선고한 것”이지만, “부활은 하나님께서 예수에 대해 ‘옳았다’고 하신 것이며 (...) 그를 살해한 권력이 ‘틀렸다’고 선고한 것이다”(178) 그러므로 십자가는 대신 죽음(대속)이 아니라, 속죄에의 참여(변화)를 요구한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6장 ‘은총에 의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에서는 의(義)를 다룬다. 바울에게 의는 예수의 피를 요구하는 복수적 정의가 아니다. 하나님의 의는 분배적이다. 의는 차별 없음이며, 평등이다. 7장 ‘그리스도 안에’는 결론 장이다. 바울에게 ‘그리스도 안’은 구체적인 삶의 방식을 지닌 정체성적인 표현이다. ‘그리스도 안’은 바울이 제국 정체성과 분명하게 손절하는 신학을 대표하는 표현이다. 제국의 방식을 따르지는 않는 이들의 공동체적 정체성을 뜻하며, 개인적인 삶의 변혁을 뜻한다.

두 저자가 옳다면, 바울에게 그리스도교 신학은 내세는 물론이고, 영적이거나 내적인 평화 같은 것으로 귀결하지 않는다. 흔히 비판하듯 바울은 체제 순응적이면서 내면적 신앙을 말하지 않았다. 그에게 신앙은 제국의 그것과 구별되는 구체적이며 공동체적인 삶이다. 그의 신학은 노예제나 성차별에 관한 바울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원동력이다. 그는 보수적이지 않았다. 바울을 보수적이거나 반동적 바울로 여기게 만든 신학을 두 저자가 비판하는 까닭은, 단순히 바울을 무디게 하거나, 오해하게 만들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을 제국 신학에 편승한 인물로 만들어, 그리스도교 신앙을 왜곡하도록 만들기 때문인 것이다.

4. 질문 및 정리
두 저자는, 그렇다면 바울 서신으로 알려진 비바울 서신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침묵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미 신약성서라는 묶음으로 읽고 있는 나머지 서신서는 잘라내야 하는가? 참고 자료 정도로만 사용해야 하는가?

궁금증은 자연히 다음 질문으로 넘어간다. 바울을 구출해야 한다는 게 뭘 뜻할까? 구원을 위해야 할 성서와 그 속의 인물을 구원해야 한다면, 이미 순서가 뒤바뀐 게 아닐까? 이미 시효를 다했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을까?

끝으로 번역도 조금 아쉽다. 내용 난이도에 비해 썩 매끄러운 번역은 아니다. 문학이나 철학서가 아닌 만큼 뜻을 살려 읽기 좋은 문장으로 옮겼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끝내 남았다. 그럼에도 장점이 많다. 급진적인 바울이라는 참신한(?) 설명도 좋지만, 무엇보다 바울을 입체적으로 만든 다음, 하나의 이야기 속에 그를 옮겨놓아 알지 못하던 바울을 상상하게 해 준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언제나 더 나은 상상력이 아닌가.



38 서평: 『첫 번째 바울의 복음』 / 존 도미닉 크로산 & 마커스 보그 / 2010 / 한국기독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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