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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poong May 15. 2023

제1장 1988년도 가을 아침조회 (3/4)

:: “얌마! 장난친 놈! 둘 다 나와!”

::  수돗가 옆 버드나무 앞, 그곳에서 시작한 우리 반 줄은, 두 줄로 길게 해서 나란히를 하고 있었다.

:: “교장 선생님께-. (선생님께-)” 그다음 경례를 해야 하는데, 사회자 선생님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어떤 비명 내지 고함이 들렸던 것이다. “아! 하지 마~!”





:: 1988년도 가을 아침조회 3부 (3/4)





여름방학 후 첫 번째 애국조회시간이었다.

여러 동요가 스피커에서 울러퍼진 것은,

이제 곧 있을 가을 운동회 때문이었다.

원래 애국조회시간에는

요한 슈트라우스 행진곡만 울렸었지만,

운동회를 앞두고 있기 때문인지

매스게임에 쓰일 다른 동요도 함께 울려 퍼진 것이었다.

  


운동장 멀리 한 쪽, 어떤 한 아이가

가을 아침의 상쾌한 공기를 들이켜고 있었다.

타이어가 둘러싼 씨름 모래판에서였다.

모래 씨름장 주변의 반쯤씩 파묻힌 타이어 위를,

아이는 팔을 벌리고 걸어 다녔다.

마치 징검다리를 건너듯이 였는데,

어떤 타이어는 쉽게 구부러졌으나

어떤 타이어는 구부러지지 않았다.



쉽게 구부러지지 않을 때면, 아이들은 상쾌한 기분이 들곤 했다. 좋고 새로운 타이어를 밟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친구가 손을 들며 아이를 불렀기 때문에, 아이는 타이어에서 내려와 무리 속으로 가볍게 뛰어 들어갔다.



아침이었고,

새벽을 지나왔기 때문에,

모래는 군데군데 이슬에 젖어 있었다.

씨름장 모래 표면은,

굳어버린 파도처럼 보였고,

아침볕에 모래 자국은

자국마다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옆에는, 실로폰 느낌으로 다양한 철봉이 늘어서 있었다. 철봉 쪽 아래 모래는 아이들이 발을 굴러댔기 때문에, 검게 젖은 속 모래가 그대로 드러나 흐트러져 있었다.



“꺅~!”

동관 앞이었다.

고학년 여자아이들은, 옆반 친구를 만나,

자지러지듯 소리를 질렀다.

손바닥을 마주치고, 폴짝폴짝 발을 구르고,

서로네 옷 끝을 매만지면서였다.

“어머 어머 진짜 진짜!”

  


저기서는 어떤 저학년이 갑자기 주먹을 쥐고 몸을 돌려, “이 나쁜 악당! 죽여버리겠다!"라며 소리를 질렀다. 만화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흉내였다. 실버 호크와 별나라 손오공,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우주 보안관 장고 같은 만화에서는, 나쁜 놈과 악당이 나왔고, 착한 놈과 주인공이 나왔다. 아이들은 물론, 하나같이 착한 놈이나 주인공에 빙의된 상태였다.

   


어떤 아이는 천천히 늑목을 오르기도 했다.

늑목은 자기의 몸이 움직인다는 점에서,

그리고 조금 더 높은 곳에 올라가

다른 조망을 통해 운동장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마치 무지개 비슷한 무엇인가로 다가왔다.

거기에는 매력이 있었다.



한 1학년 뚱보가 제법 높은 지점까지 오르고 있었다. 나였다. 나는 잠시 저쪽 정글짐을 바라보았다. '정글 짐'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파이프 직육면체를 연속으로 이어붙인 피라미드 탑으로, 아이들이 여기에서 얼음 땡을 하기도 하던 했던 놀이 기구다. 정글짐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아래쪽의 친구를 불렀다.



“학고재!” '학고재'는 제비의 또 다른 별명이었다.

"왜!"



학고재는 앞서 늑목을 오르고 난 뒤였다. 참고로, 친구 학고재는 경복궁 건너편에 살고 있는 친구로 ‘학고재’라는 미술 가게 화랑집 뒤 쪽이 집이었는데, 친구 집 지붕 위로는 타이어에 보로코 같은 것이 올라가 있었다. 나와 같은 동네 소격동이었다.



“나 봐봐."

“안 봐.” 학고재는 나를 보면서도 그런 말을 했다.



“비켜.” 내가 말했다. 방금 전 학고재와 남준혁처럼 뛰어 보기 위해서였다.

“선생님 저기 있어.” 학고재가 말했다.

“….” 나는 선생님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조심스레 늑목을 내려왔다.



“똥배! 제비! 빨리!”

우리 반 무리에서 남준혁이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이미 한 손으로 앞으로 나란히를 하면서였다.



내 별명은 똥배였다. 남준혁에겐 친형이 있었는데, 뚱뚱하고 배가 나왔다는 뜻으로 내 별명을 그리 지어준 것이었다. 이 형은 이 작명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길에서 나를 볼 때면, 항상 목 크게 “똥배~!” “어디가~!” 하고 불러 세웠던 것이다.



아무튼 제비가 무리로 뛰어 들어갔고, 나도 조용히 무리에 끼었다. 반을 찾아 줄을 섰던 것이다. 나는 제비와 남준혁과 비슷한 키였지만, 그래도 셋 중에서는 내가 가장 작았고 제비가 중간이었다.



수돗가 옆 버드나무 앞,

그곳에서 시작한 우리 반 줄은,

두 줄로 길게 해서 나란히를 하고 있었다.



당시 본관 앞 수돗가 옆으로는,

커다란 버드나무가 운치 있게 솟아 있었다.

수돗가에 닿을 듯한 줄기에, 실제로 닿기도 했던,

그리하야 땅과 흙과 운동장에 줄기를 늘어뜨리던,

치렁치렁 버드나무 한 그루였다.



상관없는 이야기일 수 있지만, 학년 초 나는 버드나무 수돗가에서 싸움을 하다가, 전교 싸움 서열 2위에 올랐다. 체육 시간이 끝나고 수돗가에서 물을 마시려는데, 한 친구가 지나치게 물을 오래 마시는 것 같아, “야 나 좀 먹자”고 살짝 밀친 것이 싸움으로 번진 것이었다.

  


싸움이라야 별다를 게 없었다. 그저 두 손으로 상대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것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뚱뚱하고 그만큼 힘이 센 편에 잘 울지 않았기 때문에, - 이 세계에서 울면 패배다 - 그 황소라는 친구와의 싸움에서 비긴 것이 되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전교 싸움 2등이었기 때문에, 나는 다음날부터 순식간에 전교 싸움 서열 2위가 되었다. 둘이 만만했다고 아이들이 떠들었고, 상대 친구도 별다른 이의를 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동요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원래의 애국조회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심벌즈가 인상적인 행진곡이었는데,

- 알고 보니 요한 슈트라우스 라데츠키 행진곡 -

이 노래를 들으면 어린이들은 자동적으로,

운동장에서 줄을 서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일종의 음악적인 전조증상이랄까,

예비적인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다!”

“어?”

“저거, 빨랫줄에 걸린 거.”

  


아이들은 만국기 줄에 걸려 있는 태극기에 반응을 나타냈다. 만국기 줄에 걸려 있는 것을 신기해했던 것인데, 아이들은 항상 어디에서 본 것을 다시 볼 경우 신기해했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아이들은 이 세상을 좀 더 익숙한 무엇인가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아이들은,

운동장에 물감처럼 깔리어 있었다.

모호한 형태로나마

자신들의 학년과 반에 맞게 대강의 무리로

줄지어 서 있었던 것이다.



“아아(아아).” 단상에 누군가 올라섰고 운동장에 메아리가 울렸다.  

 


단상에는 주임 선생님이 마이크를 잡고 서 있었고, 수돗가 옆 멍청하고 오래된 버드나무는 길게 가락 가락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가을날의 아침햇살을 때려맞은 버들가지는, 마치 연둣빛 폭포처럼, 햇살 햇살에 한줄기씩 줄기줄기 기다랗게 찢기며 천천히 한들거렸다.

  


버드나무의 밑동 주변, 가락 사이를 헤집어 들어간 그늘 속 안에는 대체 무엇이 있을까 하고 상상해 보는 아이들도 있었다. 물론 그 나무속의 그늘이 어린이가 보기에는 너무 어두웠기 때문에, 그 속이 무슨 마법사의 이야기처럼 다른 곳으로 들어가는 출입구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의 재동국민학교 1학년의 교실은, 버드나무 바로 뒤였고, 단상 뒤 본관 건물 서쪽 끝이었다. 본관 너머 저편으로, 바위가 몇 점 박힌 북악산이 솟아나 있었다. 북악산은 세모난했다.

  


주임 선생님의 명령에,

아이들은 매스게임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각 반의 담임선생님도,

몽둥이나 손날을 들며,

아이들의 줄을 맞추고 있었다.

  


“야! 가운데! 너!” 줄에서 튀어나와 있거나, 떠들고 뒤돌아보는 아이들은 주의를 받았다. 특히 고학년은 강력한 주의를 받았다. '앞으로 나란히'와 '옆으로 나란히' 등으로 맞춰 놨는데도 줄이 흐트러지는 경우가 있었다.



“야! 너! 그래 너!!” 선생님은 학생을 가리켰다. 학생이 자기냐는 뜻으로 팔을 들면 “그 뒤에!”라고 말했다. 그럼 “저요?” 하고 그 뒤에 있는 사람이 손을 들었다.

  


“어! 반보 옆으로. 좀 더 들어가! 어어. 그렇지!”

  


선생님은 눈 하나를 감고 줄이 똑바른지 살피며 막대기를 옆으로 까딱였다. 막대기를 까닥이면 학생이 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앞의 앞 친구의 뒤통수가 보이면 안 된다! 알겠지!” 아이들은 그럼 작게 ‘네’하고 대답했다. 대답은 작게 쏟아져 흩어졌다.

  


이제 평상복과 하얀 운동복 줄이

단상 앞에 규격을 맞춰 늘어섰다.

고학년의 경우, 분홍빛의 부채를 들고 있었는데,

줄을 맞춰 선 뒤에는 자리 옆에다 부채를 놓아뒀다.




“지금부터(지금부터) 애국조회를 시작하겠습니다(하겠습니다).”

  


사회자 선생님이 애국조회의 시작을 알렸다. 애국조회는 월요일마다 전교인이 나와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다.



“국민(국민) 의례가 있겠습니다(있겠습니다). 전면에 있는 국기를 향해주십시요(향해주십시요).”

 


그럼 선생님들과 학생들은,

국기 게양대에 높이 걸린 국기를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

단상 뒤에는 국기 게양대가 있었는데,

국기 게양대에 가까울수록

목을 더 높이 꺾어댔다.


  

“국기에 대하여 경례!(경례!)”

사회자가 경례를 외치면,

운동장 스피커에서 국민의례 나팔이 울려 퍼졌고,

선생님과 아이들은 진지한 마음을 가지고

태극기를 향해 경례를 했다.

  


그럼 스피커 성우가 “나는(나는)” 하고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가을 하늘의 아침햇살 때문인지,

조회대 봉 쪽에는 하얀 빛이 맺혀 있었고,

태극기에서는

뭔가 윤기 비슷한 것이 감돌고 있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앞에)…”



경례법은 오른 손바닥을 왼쪽 가슴에 갖다 대는 것이었다. 하지만 멍청한 몇몇 아이들은, 손가락을 가지런히 모으는 데에도 힘들어했다. 특히 엄지도 손날에 붙여서 가지런히 모아야만 했는데, 몇몇 아이들은 이것이 어려워, 멍청하고 귀여운 손등이 구부정하게 약간씩 솟아 올라와 있곤 했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위하여)…” 어떤 아이들은 또 선생님의 지난번 말씀을 잊고 거의 쇄골 즈음에 손을 올리곤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선생님이 직접 아이의 손목을 잡고 손의 위치를 수정해 주기도 했다.

 


“몸과 마음을 바쳐(바쳐)…”



특히 나팔소리와 함께

성우 목소리가 “굳게” 하고

강조하는 목소리가 들릴 때면,

약간 더 열심히 공부를 하고,

약간 더 선생님의 말씀도 잘 듣고,

약간 더 필기구에 준비물도 또 잘 챙기고,

부모님 심부름도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약간 3초 정도 하게 되었다.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합니다(맹세합니다).”

“바로(바로)”



배경 음악이 거의 끝나면, 녹음 속 성우는 “바로”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가슴에서 손을 뗐다.

  


“애국가 제창이 있겠습니다(있겠습니다).” 사회자 선생님이 말했다.

“1절과 2절만 부르겠습니다(부르겠습니다).”



“시작(시작)!”

시작을 하면 아이들은 반주 없이 애국가를 제창했다.

  


시작점이 약간 달랐지만,

이윽고 제창이 그러하듯,

노래는 서로 간에 하나로 합쳐지고 울림을 주며

퍼져나가고 커져나갔다.


  

2절 가사에는 남산 소나무가 나왔다. 우리 학교에서는 남산이 보였다. 본관과 단상이 남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뒤돌아선다 해도, 소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대관절 보이지 않았다. 남산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멍청한 남산타워뿐이었다.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바로(바로).”

“이제 시상식이 있겠습니다(있겠습니다). 상장 수여가 있겠습니다(있겠습니다).”



조회는 지루했다.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아이들은 달리기 출발선을 만들 때처럼 땅에 홈을 파댔다.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상장. 6학년 1반. 민기준. 위 사람은….”

방학 숙제를 열심히 했는지,

어떤 형이 단상에 올라, 두 손을 내밀어 상을 받았다.


 

방학 숙제로 곤충채집을 잘 해서 내면 학교에서 상을 주곤 했는데, 당시 수백만의 아이들은, 그 이상의 숫자로 곤충을 잡아다 죽이고, 주사기에 알코올을 넣어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고, 잡아 죽이고 찔러 죽인 다음에, 주삿바늘 알코올로 곤충을 박제하고는 곤충채집 선물 박스를 만들곤 했다.



교장 선생님은 마지막에 자신의 이름을 댔다. 교장선생님은 여자 선생님이었다.



“전체 차렷!(차렷!) 열중 쉬어!(쉬어!) 차렷!(차렷!) 교장 선생님께-. (선생님께-)” 그다음 경례를 해야 하는데, 사회자 선생님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어떤 비명 내지 고함이 들렸던 것이다.



“아! 하지 마~!”



고학년의 한 형이 크게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이 형의 이름은 남준석,

팔판동에 사는 내 친구 남준혁네 형이었다.



이 형은 싸움을 잘하지는 못했지만, 약간의 괴짜 같은 구석이 있었다. 아무튼 이 형의 비명은, 그런 성격의 발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일종의 자폭 작전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마이크를 잡고 있던 주임 선생님의 주의를 끌었다. 전교생의 주의를 끌었다. 단상 위의 높으신 분들의 주의도 끌었다.



당연히 행과 열을 맞춘 전교생을 포함해서,

운동장의 모든 고개가,

마치 기계처럼 그쪽을 향해 목을 움직였다.

  


“뭐야 거기!(거기!)” 주임 선생님이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뭐야!” 담임 선생님도 놀라 말했다.  

“거기 몇 학년 몇 반이야!(몇 반이야!)”

 


“얌마! 장난친 놈! 둘 다 나와!” 담임 선생님은, 얼굴을 찌푸리고 막대기를 흔들며, 아이들을 거칠게 앞으로 불러댔다.

 




(3부 끝. 4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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