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다. 병을 앓고 있는 부모가 있을 때 자식은 병시중이 길어지면 지친다는 말이다. 자신을 낳아 준 부모가 아플 때 간호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옆에서 살뜰히 살피거나 병원비 등 비용을 지불하는 것도 도리이다. 하지만 기간이 길어질수록 처음의 애틋했던 마음이 점점 옅어지고 현실의 무게가 자식들을 부담스럽게 할 때가 있다. 병간호도 그렇고 병원비도 한몫을 한다. 그때 주위의 사람들은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왜 생겼겠어?" 하며 지치고 힘들고 부담스러워하는 자식들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말하고, 자식들은 어느 정도 그 말에 동조를 한다.
그럼 자식의 긴 병에 부모는 어떨까? 자신이 낳은 아이가 감기에 걸려도, 길을 가다가 넘어졌을 뿐인데도 부모는 가슴이 철렁한다. 작은 상처에 눈물을 흘리면 꼭 안아 주고 대신 아파해 주고 싶다. 각종 신에게 기도를 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런 상황을 자신이 만들지도 않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인데도 부모는 자신을 원망한다.
딸은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폐동맥 협착으로 숨 쉬는 것을 힘들어하면서 잠을 편히 자지 못했다. 얼굴을 찡그리며 자주 깨어 보챘다. 졸린데도 숨을 쉴 때마다 괴로웠기 때문이다. 모정은 아이를 낳으면서 새롭게 생기는 것인지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이란 말이 나도 모르게 반복해서 나왔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미안해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할 때도 많았다. 희귀 증후군이라는 진단이 나왔을 때는 임신 기간 중 커피를 많이 마셔서 그랬을까 자책하고, 임신인 줄 모르고 맥주를 마신 그때를 두고두고 후회했다.
병원생활이 길어질수록 부모도 지친다. 아이가 아파서 안타깝지만 지켜보는 부모도 힘들다. 물론 굵은 주삿바늘이 아이의 살을 뚫고 들어갈 때, 입술이 파래지면서 숨도 잘 못 쉴 때 말도 못 하는 아이는 얼마나 힘들까. 태어나면서 엄마의 젖을 빨고 힘껏 울고 졸리면 자고 부모 눈을 마주치며 웃고 하는 일이 아이의 소명이다. 이런 일반적이지 않은, 병원에서 힘겹게 사투를 벌이고 각종 검사와 의학 장비에 둘러싸여 있으니 얼마나 두려울까 하는 마음에 애절하다.
하지만 가끔은 부모가 더 아프다. 곁에서 지켜보는 게 더 힘들다. 아이의 컨디션을 살피고, 의사 선생님의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병원비가 나올 때는 놀라고 한숨 짓고, 가장인 남편의 표정을 살피게 된다. 그뿐인가 시댁 어른들의 안부전화에 부담스럽고 그냥... 죄인이 된다. 내 탓인 거 같아 기운이 빠진다. 그래도 아이 앞에서는 늘 에너지가 넘치고 지치지 말아야 한다. 긍정적이어야 하고 기운 빠지면 안 되고 원더우먼이 되어야 한다.
긴 병을 얼마 동안을 말하는지 모르겠다. 가끔 TV에서 10년 넘게 자식의 손발에 되어 수발을 들며 쌓여 가는 병원비에 빚을 지면서도 오로지 자식이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부모를 본다. 정말 존경스럽고 대단하다. 오랜 시간 자식의 병으로 경제적으로 어렵고, 나머지 가족들의 생활도 뭔가 부족해 보이지만 아픈 아이를 우선으로 생각하며 끝이 보이지 않는 병간호에 집중하는 모습이 숭고해 보인다. 나는 그러지 못했기에 더 그렇다.
혹시 내가 그때 채 일 년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아픈 아이를 간호하면서 너무 빨리 지쳤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고작 일 년도 안 되는 몇 개월이면서 세상 시름 다 껴안은 표정으로 다녔으면서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스스로 위로 삼았던 것은 아닐까. 가끔 내가 얼마나 뻔뻔한지 모르겠다.
아이가 떠나기 얼마 전부터는 부쩍 짜증이 늘었다. 같은 중환자실의 아이들은 일반 병실로 올라가거나 집으로 돌아가는데 우리 딸의 상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희귀질환 증후군 소견을 받았고 병원비는 줄어들지 않았다. 더 이상 친정에 손 벌리기도 힘들고 남편의 벌이는 뻔했다. 지인들에게 '걱정스러운 말이 아닌 병원비에 보태라는 경제적 도움이 더 필요하다'라고 대놓고 말하고 싶었다. 앞으로 닥칠 걱정과 안타까움이 쌓여 분노로 폭발하고 있었다. 그 상대는 남편이 되기도 했고 아픈 아이를 향한 한숨도 있었다.
"왜 좋아지지 않는 거야. 집으로 가고 싶지도 않니. 엄마가 그렇게 기도하고 걱정하고 있는데..."
이런 말도 했던 것 같다. 참 너무도 일찍 지쳤다고 대놓고 아이한테 말했다. 아픈 아이한테 말이다. 건강하게 나아주지도 못한 주제에 말이다. 진심이 아니었다는 걸 아이는 알았을까. 병원이든 집이든 너만 아프지 않으면 엄마는 다 괜찮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엄마의 반성문은 이십 년이 넘게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