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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Sep 05. 2021

무한 변주, 고통과 즐거움 사이

《문체 연습》 레몽 크노 ㅣ문학동네

글의 감동은 어디서 오는가?

 번번이 같거나 비슷한 글과 만난다면 따분하고 지루하기 그지없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화를 내며 내던질지도 모른다. 만약 당신의 책이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이런 고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늘 참신한 소재와 영감이 떠올라 명작이 탄생되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을 때도 글을 써야하기 때문에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으려고 몸부림 쳐 보았을 것이다. 다른 책을 읽으며 밑줄 긋고 필사하며 재충전하든지 감동의 순간을 만나기 위해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이나 낯선 체험으로 내 글이 새롭고 진정성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같은 이야기라도 다른 사람이 하면 재미난 이야기가 내가 하면 왜 싱거워지는가. 일찍이 새로운 시도를 해 보인 프랑스 작가 레몽 크노(1903~1976)가 있다. 《문체 연습》(1947)인데 제목으로는 좀 고루하지만 특이한 책으로 실제로 문체 연습이다. 너무나 평범한 일화를 어찌 보면 이야기 같지도 않아 보이는 이야기를 가지고 99가지로 변주했다. 현대문학사에서 기념비적인 역작으로 평가 받는 이 책을 20세기 문체의 혁명이라고 하는가 하면 움베르토 에코는 “그 자체로 수사학 연습이다. 그가 이 책을 생각해냈다는 것은 바퀴를 발명해낸 것과 같은데 이걸로 누구든 원하는 만큼 멀리 갈 수 있으리라.”고 했다.

바퀴를 달지는 모르지만 그의 책이 궁금했다. 표지를 보니 제목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잠시 머뭇거렸다. 한글의 네모 틀 글꼴에서 벗어나 있다. 한국 타이포그래피(문자 조형을 만드는 것. 글꼴과 그것의 배열 등은 가독성 차원을 넘어 디자인 태도를 의미한다)의 거장 안상수가 이상에게 헌정한 ‘이상체’라 한다. 실험적인 면에서 크노와 닮아 표지와 내용이 조화를 이루었다. 크노가 대중적으로 알려지는 첫 신호탄이 된 《문체 연습》은 바흐의 푸가에서 영감을 받고 쓰게 되었다. 한 젊은이를 우연히 버스와 광장에서 두 번 마주친다는 하나의 일화로 시작해서 99가지나 되는 문체로 변주해내었다니 그의 창의적인 실험에 기가 눌린다. 책 띠지에 있는 저자의 얼굴처럼 글마다 표정이 각기 다르다. 그는 “현실을 형성하고 정의하는 것은 언어 자체”라고 말하며, “중요한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있”음을 강조했다.


“출근 시간, S선 버스. 스물여섯 언저리의 남자 하나, 리본 대신 끈이 둘린 말랑말랑한 모자, 누군가 길게 잡아 늘인 것처럼 아주 긴 목. 사람들 내림. 문제의 남자 옆 사람에게 분노 폭발. 누군가 지날 때마다 자기를 떠민다고 옆 사람을 비난. 못돼먹은 투로 투덜거림. 공석을 보자마자, 거기로 튀어감.

두 시간 후, 생라자르역 앞, 로마광장에서 나는 그를 다시 만남. 그는 이렇게 말하는 친구와 함께 있음 : “자네, 외투에 단추 하나 더 다는 게 좋겠어.” 친구는 그에게 자리(앞섶)와 이유를 알려줌. “ <약기 略記>*메모나 노트 등 잊기 전에 급하게 적어두는 것을 말한다. 

윤중일 작가의 백두산 천지

변주들은 99가지 외에 10편이 더 추가된다. 프랑스에서 조차 ‘번역이 되는 책이야’라고 했을 정도로 그의 작품은 번역 불가능에 가까운 문제적 텍스트다. 이 책은 해설과 함께 읽었을 때 이해가 되었다. 이야기를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겠다. 

<거꾸로 되감기>는 약기의 장면을 거꾸로 되감아 회상하는 방식으로 이야기 전반을 재구성하였다.

“자네 외투에 단추 하나 더 다는 게 좋겠네, 그의 친구가 그에게 말하고 있다. 나는 로마광장 한복판에서 그를 만나게 될 터였는데, 어떤 좌석 하나를 향해 탐욕스럽게 돌진하던 그를 떠나온 후의 일이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중복하여 말하기, 조심스레, 은유적으로, 당사자의 시선으로, 다른 이의 시선으로, 객관적 이야기’처럼 상상이 되는 제목이 있는가 하면 글에 맛을 느끼게 하는 묘사라든지, 미쿡 쏴아람 임뉘타, 저자의 수학자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등 스스로 이름을 붙인 그 형태에 따라 같은 장면을 무수히 변주한다. 이러한 99번의 변주로 부족했는지 추가 편을 넣었을 정도이니 이를 한국어로 옮긴 번역가의 노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역자가 크노처럼 변주한 <번역자와 편집자>를 읽으면 짐작이 될 것이다.

“골탕을 먹이려고 일부러 발등을 밟듯이, 이 따위로 써놓기라도 했다는 식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작가를 불러 세워, 당장에 따지기라도 할 듯이 허공에 대고 분노를 표출하거나, 당장 멱살이라도 잡을 모양으로, 따져 물을 태세로, 혼자서 길길이 날뛰거나, 자료들을 찾아내고는 그걸 읽느라 내내 책을 붙들고 있었다.…”

 그러나 ‘지는 촌놈이유와 영어 섞임 투로 원 데이, 미드데이에, 버스 테이크한 나라든지, 어느 날 낮뒤 해쪼임량이 맨마루에 올랐을 무렵에~이북사람입네다나, 일본어 물을 이빠이 먹은‘ 등의 번역은 읽는 재미를 더했다.  


<집합론>

“S선 버스에 앉아 있는 승객을 집합 A로, 서 있는 승객을 집합 D라고 간주한다. 어떤 정류장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집합 P가 있다. 또한 버스에 오르는 승객 집합 C가 있다…”


<창唱 풍으로>는 ’어중음 첨가’와 같은 방식으로 단어 가운데에 유사한 음절을 첨가하는 방식이다. 이를 창을 부르듯이 읽어보면 재미가 있을 것이다.

“어허어느 나하아알 정호오 무후려업 , 버어허스의 후우부스흥가앙장 우에서는- 중략- 크으으으응은 소오리리이이로 대에화를 나아아아아누고 있어어어어어어어었다…”


<간투사>는 감정 감탄사와 의지 감탄사가 섞여 있다.

“어이! 어허! 아하!오호!흥! 아하! 휴! 어어! 어럽쇼! 오우! 쳇! 핏! 아야! 우우우! 야야야! 어어! 잉! 어허! 휙! 어럽쇼! 어이! 쳇! 오호! 어허! 저런!…”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리포그램>이 있다.(문자 하나 또는 여러 문자를 단 한 차례도 사용하지 않고 구성된 텍스트를 의미한다.) 이 분야의 대가는 조르주 페렉으로 가장 흔한 모음 e를 한 차례도 사용하지 않고 장편 추리소설 《실종》을 완성했다. 역자는 우리말의 ‘이응’이 없는 낱말로 원문을 재구성했는데 제대로 된 제약을 가지고 면모를 갖추기까지 많은 고심을 했을 것이다.

 마지막 글의 제목 <반전>의 원제는 <예기치 않은>이다. 반전은 이미 작품으로 많이 활용하고 있다. 난해했던 것으로 철학용어와 개념들을 사용하거나 기하학, 수학을 언어로 삼아 새롭게 구성한 문체는 해제를 읽어도 이해가 쉽지 않았다. 언어의 한계를 느끼며 무슨 내용인지 뒤죽박죽되어 버리기도 했다.

 저자의 의도는 연습을 해보는 것이었는데 녹슨 문학에서 문학을 잘라내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했다. 크노가 제약과 잠재를 양손에 하나씩 쥐고서 펼쳐낸 《문체 연습》에는 소박하고 수공업적인 작업으로 99개의 놀이들이 바글거린다.

윤중일 작가의 작품

 이 작품이 1973년까지도 심도 있게 수정작업이 행해지는 가운데 음악으로 변주되어 공연되거나, 연극으로 개작되어 수차례 상연되었으며 다양한 시청각자료로 제작되는 등 대중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주제에 관한 모방과 반복이라는 점에서 푸가와 닮은 《문체 연습》은 하나의 상황을 기준으로 다양한 변화를 보여주었다. 하나의 서사가 어떤 식으로 변하게 되는지는 흥미로웠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읽기가 쉽지 않아 맥이 풀렸다. 그러나 나는 글을 쓰기 위해서 이렇게 고심해 본 적이 있는지 스스로 묻게 되었다.

많은 가능성을 지닌 크노의 《문체 연습》은 긴 세월 동안 대장장이가 칼을 가다듬듯이 정성을 다해 창작되었다. 다양한 문체가 지닌 잠재성과 혁명적인 힘을 얻어 99가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다만 몇 가지라도 시도해보는 사람만이 고통 뒤에 오는 즐거움을 맛보게 되리라. 창조는 언제나 불완전한 모험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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