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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옥 Oct 16. 2024

비밀일기

엄마

1.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두 가시나가 사형 선고를 받았다. 한 건은 집행되었고. 한 건은 보류되었다.  

  

 아침부터 내리던 비가 그 밤이 지나도록 쉬지 않았다. 삽자루 하나만으로 산속의 땅 파기가 쉬울 것인가? 시신처리를 쉽게 할 수 있도록 하늘이 도왔다. 

 통행금지 예비 사이랜을 불어 온 시민에게 잠잘 시간이라는 걸 알려 주었고. 자정에 통행금지 사이렌을 불어 골목을 텅텅 비웠다. 시신을 옮기는데 방해하지 못하도록 당국이 도왔다. 1960년대 후반이었다.

 

2.


진짜 진짜 비밀인데. 

난 엄마가 싫어. 그래서 엄마가 죽을 때까지 거의 옆에 붙어있었지. 

농소면 산골짝에서 김천으로 시집온 엄마가 죽을 때까지 김천에서 살았잖아. 그래서 나도 김천을 떠나지 않았어. 고런 말을 하는 엄마의 속마음이 어떤지. 요런 말을 하는 엄마의 생각이 무엇인지? 꼭 - 알고 싶었거든.


고지식한 내 인생 상도벌도 주지 마오.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뿌린 만큼 살았습니다.  

가진 만큼 아는 만큼 배운 대로 들은 대로. 가난 없고 그늘 없는 그런 세상없겠지만은

그래도 사랑하고 웃으며 살고 싶은. 고지식한 내 인생 상도벌도 주지 마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내 몫만큼 살았습니다.

바람 불면 흔들리고 비가 오면 젖은 채로. 이별 없고 눈물 없는 그런 세상없겠지만은

그래도 사랑하고 웃으며 살고 싶은. 고지식한 내 인생 상도벌도 주지 마오.


 노인대학에 다니면서 엄마가 시시때때로 흥얼거린 노래야. 특별히 내 몫만큼을 강조하며 바람 불면 흔들리고 비가 오면 젖은채로를 반복했지. 그때마다 나는 삐죽거렸어. 사랑이 있기나 해? 정말 웃고 싶어? 바람 불면 피하고 기둥이라도 잡고. 비 오면 우산 쓰지 왜 흔들리고 비 맞아?  투덜투덜. 물론 속으로만.  


1936년생 엄마는. 

시골에서 오 남매의 맏이로 태어났지. 엄마 치맛자락 붙잡고 따라다니다가 해방을 맞고. 6.25도 만났다. 외진 시골이라 피난 보따리는 싸지 않았다. 새벽이면 산속으로 숨어들었다가 깜깜한 밤이면 살금살금 내려왔다고.  공산군보다 미군이 더 무서웠다던가? 빨갱이라기에 빨간 사람인 줄 알았더니 우리랑 같더라고 했다. 휴전 이후. 빨갱이로 몰려 죽임 당한 몇몇 사람들이 한동네 사람이었다는 기억이 있을 뿐. 엄마의 세상은 여전히 부엌이었고 마당이었고 외양간의 누렁소 두 마리가 전부였다. 

 작두로 소여물을 썰다가 손가락 한 마디가 잘려나갔다. 그래도 여전히 소를 돌보고 죽을 끓이고 여물을 썰었다. 밤마다 커다란 소쿠리 한가득 무채를 썰었고. 다음날 아침에 쌀 몇 줌 넣어 밥을 지었다. 어른들의 밥그릇을 채우고. 남자들의 밥그릇을 채우고 나면. 여자들의 밥그릇엔 쌀알 몇 개 섞인 무채뿐이었지만 그마저도 배가 고팠던 시절. 그렇다고 넉넉한 집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가끔. 친구네의 부엌에서 보게 된 밥상. 부엌방에서 물려낸 밥상에 쌀밥이 있었단다. 군침이 도는 밥그릇을 보면서 참느라고 힘들었다고.  


-그 집에 가면 배는 곯지 않을 거야.

 스무 살이 되던 해. 김천 장에 다녀온 아버지가 시집을 가라 했다. 누군가의 소개가 있었는지? 어쨌거나 두 어른이 장터에서 만나 술 한 잔 마시며 통하는 게 있었다던가? 

 신랑 얼굴 한 번 제대로 안 보고 그저 시키는 대로 혼례를 치렀단다.  아버지의 존재는 엄마의 세상에서 가장 큰 어른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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