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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정률 Mar 29. 2024

명절의 숫자만큼 들었던 노래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사운드 트랙

냄새나는 음악 <사운드 오브 뮤직>

아빠는 6남매의 외동아들이었다. 그 때문에 북적북적한 분위기에 온갖 스트레스가 생긴다는 남의 집 명절과는 달리, 지극히 고요한 명절이었다. 그럼에도 삼대독자는 차례는 지내야 했고, 엄마는 하루 종일 바빴다. 맏딸은 집안의 살림 밑천이라는 말을 늘상 들었던 때이다. 숙제처럼 명절마다 지글거리는 프라이팬 앞에 앉았다. 


엄마가 다진 소고기와 야채들을 번쩍이는 스탠 그릇이 두고 가면 척척 치대기 시작한다. 밀가루와 계란까지 넣으면 소리는 더욱 찰져진다. 척, 척, 처억.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이 그려져 있던 쟁반에 쌓여있던 밀가루와 샛노란 계란물들을 적당히 섞어서 전을 부쳤다. 집안엔 눅진하게 기름냄새가 퍼지고 손가락은 개구리발처럼 끈적한 밀가루 구슬이 달린다. 


영화 <사운드오브뮤직>의 노래들을 들으면 이상하게 코를 킁킁거리게 된다. 엄마는 하루종일 부엌의 불 앞에 서있고, 나는 주로 TV앞에 가스버너를 하나 차고앉아 전을 부쳤는데, 이 영화가 흘러나왔다. 아마도 거의 매년이었다. 오래된 영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봐서 혹은 이미 알아서, 하지만 좋아서. 어쩌면 명절의 긴 편성표의 시간을 때워야 하기 때문에, 오전도 아니고 점심도 아닌 애매한 시간에 스치듯 흘러나오던 영화가 내 명절의 말동무였다. 푸르른 알프스의 풍경과 줄리 앤드류스의 시원한 목소리는 나의 느끼한 콧구멍 사정과는 달리 더없이 청량했다. 



지긋지긋하게 보아도 지긋지긋하게 또 본다



영화 마니아를 자청하던 고모는 주말의 명화에서 나오는 영화들을 녹화해 두고 여러 번 돌려보았다. 지금이라면 저작권이며 난리 날 일이지만 그때는 텔러비전에 나오는 영화나 오빠들의 가요톱텐 무대를 다시 보고 싶으면 시간을 딱 맞춰 기다렸다가 녹화버튼을 눌러야만 했다. 사운드 오브 뮤직도 당연히 고모의 컬렉션에 당당히 자리했는데, 덕분에 나는 텔레비전에서 그 영화가 나오지 않는 명절에도 함께 할 수 있었다. 돌아오는 명절의 숫자만큼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래도 지겹지 않은 음악이었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것이, 그게 바로 명작이라고 주장하는 듯이. 

 

<사운드 오브 뮤직>은 모두가 아는 대로 웰메이드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이자, 1965년 개봉한 이후 50년이 넘도록 사랑받는 명작이다. 1966년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로버트 와이즈), 음악편집상(아이린 코스텔), 음향상(로버트 터커), 편집상(윌리엄 레이놀즈), 골든글로브상 뮤지컬/코미디 부문 작품상, 여우주연상(줄리 앤드루스)까지 인정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멜로드라마도 싫어하고 로맨틱은 가까이하지도 않는 나마저 이 영화를 자꾸 다시 본다니? 자기를 찾고 싶어 천방지축한 견습수녀 '마리아'가 결국 신데렐라가 되어 버린 진부한 이야기를 손에 꼽다니, 하면서도 이 영화가 내가 즐기는 것들과 선택하게 된 것들의 원천에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https://youtu.be/2 G6 dd7 ikrXs? si=b6k9Jm42_aHtoIRb


말괄량이 소녀 같은 견습수녀 마리아는 노래를 부르며 뛰어다니다가 폰 트랩 대령의 가정교사로 갈 것을 권유받는다. 사실상은 쫓겨난 것이다. 군대식으로 자라나는 일곱 명의 아이들과 호루라기로 아이들을 부르는 대령 사이에서 마리아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음악으로 다리를 놓는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그렇다. 


자신이 머물게 된 곳과 달리, 스스로 해야 하는 일과 타인이 평가 내리는 것에 반해 자꾸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을 때 떠나게 된다. 아니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 떠남으로써 새로운 환경에 부딪히고 그 속에 자기 자신이 되게 하는 것과 자신이 원하는 것이 선명하게 보인다. 물론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자기 찾기에 수반되는 불편함과 무력감의 앞에 때, 가끔은 진짜로 외면하고 도망치고 싶어질 때, 마리아는 노래를 부른다. 촌스러운 모자와 쩍 벌린 다리는 필수다. 


I must dream of the things I am seeking. 

I am seeking the courage I lack. 

The courage to serve them with reliance, Face my mistakes without defiance. 

Show them I'm worthy And while I show them I'll show me! 

So, let them bring on all their problems, I'll do better than my best.


https://youtu.be/JJYz8pyXOG4?si=zLQPEp_mxRdSvbzx


뮤지컬 영화에서야 당연히 모든 것들이 음악으로 표현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이런 당연함이 좋았다. 노래로 흥얼거릴 수 있는 좌절과 희망, 나눠 부를 수 있는 노래, 음악과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것들, 그 속에서 우리가 더 선명해지고 유연해질 수 있다는 기분. 


내가 보낸 명절의 숫자만큼 나이가 먹고, 또 노래들을 흥얼거리는 동안, "these are a few of my favorite things"들이 생겼다. 음악이 사람들을 흔들 때의 파동, 영화의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갈 때의 웅성거림, 음악을 보여주고 영화를 들리게 하는 것들, 흔들리고 단단해지는 사람의 마음. 찬란하고 심플한 변화의 순간. 이 노래들 너머에서 내가 선택한 것들의 목록이다.  


https://youtu.be/ivVJEO5UEFU?si=-hn6vwJv9WVYfOtJ


My favorite things는 워낙 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사랑받아 여러 버전이 있지만, 가장 좋아하는 버전은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 <어둠 속의 댄서>에서 나오는 비요크의 버전이다. 공기가 내려앉은 공간에서 오로지 목소리와 그 자신이 두드리는 소리로 부르는 노래. 삶의 무자비함을 노래로 삼켜버린다. 목소리의 물기가 사라져 가는 노래의 마지막마저도 슬프다. 



요를레이 잇-호!


짝꿍 동거인과 처음으로 가장 긴 시간을 보내게 된 신혼 여행지에서, 욕조 속에 선물 받은 거품비누를 풀고 누워 나른함을 즐기고 있었다. 비행기 안의 불편함도, 결혼식의 혼잡함도, 새로운 인생의 문턱에 대한 긴장감도 나의 명절 노래, 나이가 들어가는 노래에 숨겨 흥얼거렸다. 저 멀리 침대에 뒹굴거리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노래 진짜 좋아하는구나" 

나의 애정이 들켰다. 


https://youtu.be/UmmOJx_Hxto?si=8g8b355mKGkiZk7A


덩달아, 나의 작은 동거인에게도 이 영화 속 좋아하는 노래가 생겼는데, "The Lonely Goatherd"이다. 아이들이 인형극을 할 때 부르는 노래이다. 미처 자라지 못한 혀로 요를레이 요를레이 거리며, "엄마 요를레이 틀어주세요"라고 조른다. 


그때마다 내내 종종 거리던 엄마 발소리와 오래도록 보글거리는 탕국 냄새의 리듬, 그러고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고요하던 우리만의 명절 풍경이 떠오른다. 다음 명절에는 이제 넷이나 된 나의 가족들과 우리만의 명절을 기념해 보아야겠다. 그렇게 다시, 같이 나이를 들어가야지. 

Happy are they lay dee olay dee lee o   

yodeling Soon the duet will become a trio 

Lay ee odl lay ee odloo Odl lay ee, old lay ee 

Odl lay hee hee, odl lay ee Odl lay odl lay, odl lay odl lay, odl lay odl lee 

Odl lay odl lay odl lay H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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