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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정률 Jul 07. 2024

어머님, 아이가 친구를 문 것 같아요

미숙한 학부모의 첫 번째 수업  


항상 처음을 사는 우리들의 무궁한 여백

어떤 부분들은 여백으로 남겨두자고 생각했다. 인생의 여러 부분들은 예측하고 싶고 어느 정도는 최대한 준비하고자 노력하겠지만, 결코 가능하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 때로 나의 어떤 여백은 멍청함이었고,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처참함이기도 했으며, 인생을 반전시키는 부분도 있었다.


요즘 나에게 가장 큰 책임감과 동시에 당혹감을 주는 여백이 있다면, 부모가 - 그것도 두 아이의 엄마가 - 되었다는 것이다. 엄마가 되었고 좀 지나다 보니 학부모가 되었다. 아이가 사회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은 또 다른 무궁무진한 여백이 생기는 일이다.


‘엄마도 처음이잖아’라는 문장을 좋아하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사는 게 모두에게 처음이기 때문이다. 저 문장은 두 가지 공포를 내포하게 된다. 당신은 엄마라는 존재에게 당연한 역할을 부여해 왔다는 것, 당신의 인생이 처음이 아니라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것. 나는 두 가지 다 믿고 싶지 않은 편이다.


어쨌든 모두가 처음이기 때문에, 처음일 수밖에 없는 ‘나’를 소지한 채, 늘 낯선 상황 속에 던져지기 때문에 우리는 두렵다. 겁이 난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즐기고 어떤 사람들은 천천히 걷는다. 나는 후자다. 빨리 뛰어가서 천천히 배운다. 아니나 다를까, 학부모 되기도 그렇다.



어머님, 아이가 친구를 문 것 같아요



평소와 다름이 없는 하원길이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비눗방울을 챙겨서 나갔고, 아이가 제 반에서 나올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며 식단표를 읽었다. 둘째 아이 출산을 위해 연장반 적응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고, 아이는 누구보다 신나했기에 발걸음이 무겁지 않았다. 몇 번 뵙지 못한 연장반 선생님이 아이의 손을 데리고 나왔고, 평소처럼 인사를 했는데 불현듯 이렇게 묻는다.


“어머님, 아이가 집에서 혹시 무나요?” “네? 물어요?”

“오늘 아이가 놀다가 친구의 등을 문 것 같아요.” “네?”

“집에서도 그런 습관이 있는지 어머님께 여쭤보고 싶었어요”

“아니요, 흠, 난처하셨겠어요, 저희 아이는 집에서 무는 습관이 있거나 그런 적이 없는데요, 혹시 확인해 보시고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


손가락에 자꾸 힘이 들어갔다. 마음도 뻣뻣해졌다. 인사를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재빨리 아이를 세발자전거에 태우고 비눗방울을 손에 쥐어 주고 물었다


“아가 오늘 친구 물었어?” “네”

“친구가 화나게 했어?” “아가 무는 게 뭔지 알아?” “네”


우리 아이는 정말 그랬을까? 아이의 대답은 '그렇다'였다.



내가 제일 미숙하다



돌아오는 걸음 내내 속이 뜨거웠다. 처음 선생님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낯선 기분이 들었다. 나의 시선이 비틀어졌다는 기분.


나의 아이가 그럴 리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근래 자기주장이 많아지고 물건을 던지거나 위험한 행동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대체로는 말로 표현할 줄 아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놀이터나 다른 아이들과 있는 상황에서도 물러서는 편이지 들어가서 문제를 만드는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당연히 나의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고 반문한 것은 옳았나? 나의 관찰과 예측이 틀렸을 가능성은? 혹은 그 상황의 주도자가 아이가 아니라면 누명을 쓰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더 정당하게 결백을 주장했어야 하는가?


그럼에도 화가 났다. 당혹감이 너무 커서 가려져 있던 분노가 차근차근 드러났다. 왜 정확하지도 않은 내용으로 나의 아이를 가해자라고 특정하였는가? - 선생님의 설명은 직접 보지는 못했고, 아이가 울어서 가보니 선우가 우는 아이 뒤에 있었으며 우는 아이의 등에 잇자국이 있었다는 정황일 뿐이었다. 그리고는 확정되지 않은 내용으로 낙인을 찍은 것인가?


아니, 이것은 정당한 분노인가? 눈이 가려진 엄마의 제 자식 그러 안기인가? 내가 나의 아이는 그럴 리 없다는 눈먼 장님처럼 생각하는 것인가? 정말 우리 아이가 물었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반면 남편은 나의 마음에도 동조하지만 동시에 차분하게 대응했다.


남편과 통화 후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제가 아까 당황스러워서 말씀을 제대로 나누지 못한 것 같아서요, 혹시 그 아이는 많이 다치지 않았나요? 다행히 다친 곳 없는 없고 아이의 부모들도 웃으며 넘겼다고 하신다.


나는 상대방 아이의 안부를 묻지 못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리고 나의 아이에게 계속해서 추궁하듯 "물었냐"는 질문을 했다. 아이에게 명확한 지침을 주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신뢰를 주지도 못했다. 싸울 수 있고 다칠 수 있는 성장의 과정을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게 때로는 맞고 상당히는 틀릴 것이다. 해치지 않고 조율하는 법을 익히도록 알려주어야 하는 것은 나인데, 기울어진 나는 자꾸 잘못된 질문만을 했다. 나는 나 때문에 당혹스러웠다. 이런 낯선 내가 어떤 부모가 될 수 있는 것일까?



감춰지고 오해된 채로


정확한 진실은 여전히 모른다. 나의 아이가 이빨자국의 주인일지도 모른다, 아니라면 오해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 아이는 자라면서 누군가를 때릴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누군가는 다칠 수 있고 어떤 날은 누군가에게 잔뜩 상처를 받아서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라면, 나는 알 길이 없다.


아이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여백 속에서 그렇게 자랄 것이다. 나도 겪었던 불의를, 저지른 부정을 부모와 공유할 수 없었다. 나의 아이도 나처럼 감춰지고 오해된 채로 자랄 것이다. 그 앞에서 나는 어떤 부모일 수 있을까? 나의 부족함이 너에게 상처가 되지 않게 할 수는 없을까, 우리의 사이가 적당히 멀고 또 아주 가까운 사이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인생의 것들은 여백을 많이 남겨두고 매번 낯설게 던져진다 믿는다고 말해도, 실상은 그리 되지 않는다. 매일 징징거리고 바득바득 정신을 차려서 내가 그 앞에 서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마치 인생을 내가 살아가고 있다고 - 나는 마침내 정복된 내 인생을 살고 있노라고 외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처음이 아닌 것처럼 거만을 떨고 속으로는 여러 번 테이프를 다시 놀려서 마치 익숙한 사람처럼 굴려고 한다. 두려움 때문에 그렇다.


처음이라, 낯설어서. 그런 이유들이 잘못의 이유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온통 배울 것이 많은 아이의 세계도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겠는 학부모로서의 나의 세계도. 두렵고 당혹스럽다는 이유로 인간적인 따스함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혹이 유연하게 만드는 훈련이 되면 한다. 무엇보다 너를 이해하고 상상해 낸 내 속의 네가, 진짜 너와 많이 다르지 않기를 바란다. 그 무엇도 해내지 못한 채 쓰는 희망의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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