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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축구 경영인 박영곤 Mar 02. 2020

스타트업의 스타트

과거의 나는 이미 그 첫발을 디뎠을 것이다


대학 신입생 시절 나는 같은 학과 동기인 유진이와 매우 가깝게 지냈었다. 교양 국어 시간으로 기억하는데 유진이가 수업 시작 전 강의실에 도착해 있었고 나는 '옆에 앉아도 될까?'라는, 지금 생각하면 무슨 강단이었는지 모를 패기로 먼저 다가섰다. 털털했던 성격의 유진이도 옆자리에 놓은 가방을 치우며 흔쾌히 나의 들이밈을 받아주었고 우리는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학교 밖에서도 몇 번 자리를 가지며 친하게 지내기 시작했다. 유진이는 이후 발매했던 SES의 새 앨범 재킷 Special thanks to에 내 이름을 넣어주기도 하였고.



군 입대 후 뜸해진 사이고 제대 후에 본 적은 없기에 이젠 추억 속의 친구로 남아있지만 유진이를 떠올릴 때면 항상 기억나는 것이 사이더스라는 연예 기획사이다. 나는 중고교 시절 엄청난 영화광이었고 영화감독 혹은 배우를 꿈꿨었다. 폐점하는 비디오 가게를 찾아 두 박스 가득 영화 테이프를 사서 줄기차게 보기도 했고 영화 전문서적을 꽤나 진지하게 읽었던 기억도 있다. 당연히 연예인이었던 유진이게도 이런 나의 꿈을 이야기했었는데 이를 잊지 않고 상기 기획사에 개인 오디션 기회를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긴장된 마음으로 도착한 사이더스 삼성동 사무실. 준비한 프로필 서류를 전달하고 바로 카메라 테스트가 진행되었다. 영화 미스터 리플리의 맷 데이먼 연기를 시도했는데, 그의 사이코스럽지 않은 사이코 연기를 상당히 인상 깊게 보았던 터였다. 나는 곧 연기에 푹 빠져들었고 맷 데이먼이 극중 친구로 나오는 주드 로를 살해하는 장면을 재연했다. 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광기 어린 나의 눈동자에 웃음을 참지 못하는 담당자분의 얼굴이 겹친다. "수고하셨네요,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친절하고 황급하게 나가는 문으로 나를 안내했다.


마드리드 사업 초기의 사무실. 방 하나에 데스크 몇 개가 전부였다.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 연락은 도착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는 40이 넘은 지금도 그때 가졌던 영화배우에 대한 미련이 조금은 남아있는 듯하다.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그때 좀 더 배우의 꿈에 더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도전해봤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배우와 함께 꿈꾸었던 영화감독의 길에 뛰어들었다면 어땠을까. 제대 후 모 대학 연극 영화과의 졸업작품에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었지만 딱 거기까지가 나와 영화를 이어준 마지막이었다. 열정이 모자라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영화에 대한 꿈을 접었고 아직까지도 그때 더 달리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스페인에서 스타트업을 시작했을 때, 그 이전 회사를 퇴사하고 나왔을 때 나에게 두려움이란 없었다. 지식, 네트워크, 자본 등 모든 것이 미천한 상황이었지만 잘 할 수 있을 거란 근거 없는 믿음과 자신감만 가득했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추진했던 프로젝트들은 결과물로 이어지지 못했고 거듭된 좌절이 나를 무너뜨리기 위해 냉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타지에서 겪어야 했던 경제적 궁핍은 딸아이의 약을 사지 못하던 날 낭떠러지의 끝자락까지 밀어붙였다. 흥겨운 분위기로 물든 연말 사람들의 웃음 띤 얼굴을 보며 사무실로 터벅터벅 걸어가던 그때의 복잡했던 감정은 추운 바람과 함께 내 마음속 깊숙이 각인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일어섰다.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인내가 있었기에 가능했었지만 내 스스로는 오기가 생겼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진정 현명한 사람은 물러서야 할 때를 아는 사람일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의 현명함은 그보다 한참 못 미쳤고, 그것보다는 미래의 나에게 떳떳해지고 싶은 욕심이 더 컸다. 아무런 두려움 없이 시작했다지만 내 마음의 기저에는 축구를 또 다른 영화로 남기진 않을까라는 무서움이 있었다. 좋아한다고 무턱대고 달리다가 갑자기 또 그 열정이 휘발하며 사라지지 않을까라는 공포가 있었다. 이렇게 또 무너진다면 과거 나와 영화가 그랬듯 나와 축구 역시 일장춘몽, 그저 젊은 시절 호기로 발만 담가보고 말았다는 미련과 아쉬움을 평생 남겨줄 것이다. 그것이 싫었다. 끝을 보고 싶었다.


퇴근 길 밤 하늘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다독였던 수많은 날들이 기억난다


이후 사업은 조금씩 성장하기 시작했다. 몇 년간 빛을 발하지 못했던 프로젝트들은 그간 쌓였던 경험과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차근차근 결과물을 낳아주었다. 그렇게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났을 때, 혜진이와 슈퍼에 가서 좋아하는 초콜릿 과자를 사줄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을 때, 회사를 규모 있게 운영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스페인 축구팀 인수라는 새로운 도전을 품었다. 마드리드에 위치한 건물의 작은방 하나를 빌려 시작했던 스타트업이 축구팀 구단주라는 꿈을 이루고 이어서 3부 승격이라는 승격의 기쁨까지 누릴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실패에 대한 것이 아닌, 흐지부지 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목표를 달성하기까지 나를 뛰게 만든 원동력이 되어준 것이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이 스타트업의 시작은 아마도 유진이와의 만남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한다. 스타트업의 시작은 해당 비즈니스의 아이디어가 떠오른 시점, 회사를 등록한 시점, 사무실을 얻은 시점이 아니라 어떤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사고를 시작한 시점이라 생각한다. 내 삶의 큰 지향점이었던 영화를 떠나보내고 일반 회사에 취직했으며 이후 영화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곱씹으면서 앞으로의 도전에는 그것이 무엇이든 끝을 보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마음속에 깊이 각인해온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은 마드리드에서의 도전을 가능케 한, 스타트업의 스타트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원대한 목표와 세련된 사업 계획서 만큼이나 나를 스타트업으로 이끄는 근원적인 이유와 원동력에 대해 고민해 보길 권하고 싶다. 지금 스타트업의 돛을 올리는 당신은 이미 훨씬 전 그 첫 발을 디뎠을지 모른다. 사소했던 혹은 적잖이 당신의 삶을 차지했던 과거의 어떤 부분들이 지금의 도전을 가능케한 씨앗을 심었을 수 있다. 스타트업의 스타트는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위해 던졌던 물음이자 바람의 울림일 수 있다. 앞으로 펼칠 사업에 대한 고민뿐만 아니라 지나온 나 자신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이 미래의 험난한 항해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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