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wer East Side 산책하며 발견한 뉴욕의 생얼, 민낯
총 5개의 Take로 구분하여 작성하였습니다.
Highline 에서 조깅하는 사람들
일요일 아침이었지만 서둘러 나섰다. 원래는 새벽녘의 하이라인 공원의 모습을 보고싶었는데 PATH train(당시 숙소가 뉴저지 Hoboken에 위치했다.)을 잘못타는 바람에 한시간을 버렸다. 덕분에 오전 9시가 다 되어서야 하이라인공원이 위치한 Meatpacking District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이라고 할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조깅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오후에는 관광객들로 가득차 조금도 걷기 힘들 것인데, 이렇게 뛰는 사람들을 보니 그 또한 반가웠다. 내 좌우명은 '돌아가는 길에도 풍경이 있다'로 삶을 풍경을 즐기기 위한 여정쯤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데, 이렇게 멋진 풍경을 배경으로 뛸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삶일까 생각해봤다.
중저가 맛집이 많은 대학가 Astor Place
2009년 처음으로 뉴욕에 방문하게 되었을 때에는 대학생이었다. 고등학교 친구중에 NYU 스턴에 다니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를 만날 때면 어김없이 Astor Place를 찾았다. 그 이유는 첫번째, 지하철 #4, #6이 지나고, 5th avenue를 따라 버스정류장이 많이 위치한다. 두번째, 주변에 NYU/Cooper Union University 학생들이 자주 가는 식당이 많다. 맛도있고 가격도 뉴욕 물가기준으로 중저가에 속한다. 세번째, 생각보다 주변에 볼거리가 많다. 섬의 중간 아래, 즉 아래부분에 속하다 보니 역사적인 장소가 많다.
움직이는 조형물, Alamo
특히 가운데 Alamo 조형물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움직이는 조형물로서는 1세대 격인 공공미술품인데, 실제로 두명정도가 힘을 합하면 Spin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주변에 스타벅스가 있어서 화장실이 급하거나 무료로 와이파이를 써야할 때 용이했다. 그래서 만남의 장소로 자주 사용했다.
허름하고 남루하지만 힙하기도해, Lower East Side
Tenement Museum 에서는 미국 이민자들이 정착당시 살았던 가옥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살던 집이 굉장히 좁고 불편했기 때문에 지금도 관람을 위해서는 예약은 필수다. 나는 Lower East Side 라 불리우는 이웃을 둘러보는 워킹투어를 신청했고, 이 지역이 얼마나 생동감 넘치는 곳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민자들의 터전, 왜 보존해야 하는가?
날씨가 너무 좋았다. 이웃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 기분이었다. 우리는 Sarah D. Roosevelt 공원에서 만나서 인원을 점검하고 출발했다. 공원은 낡고 허름한 건물들로 둘러싸인 세로가 지나치게 긴 형태다. 원래는 건물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도로를 확장하려 했지만 세계 대공황이 터지자 도로확장계획은 흐지부지되어 그대로 방치되었는데 동네 주민들이 이 터를 놀이터, 운동장, 작은 텃밭등으로 사용하면서 현재와 같이 변하였다고 한다. 차례로 Lower East Side의 역사적인 장소들을 둘러볼 수 있었는데, 이 일대에 거주하던 중앙아시아인들이 어떻게 생활을 했는지, 그 사이를 비집고 중국인들은 어떻게 생활을 하게되었는지 -- 특히, 그들이 상점을 개조해 관우신을 모시는 사당을 차린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 전세계의 이민자들의 고군분투한 흔적을 따라 움직였다.
뉴욕이란 도시의 배꼽(Belly button)같은 곳
이 곳이 배꼽같은 곳이라 했다. 모든 것이 시작된 곳이지만 가장 낡고 허름한 곳. 지난 100년의 세월동안 끊임없이 재개발의 대상이자 빨리 해결해야할 문제덩어리었던 장소.
나는 시작부터 끝까지 같은 질문을 머리에 이고 투어에 참여했다. 우리는 왜 자신이 살아온 터전을 버리고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걸까?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생활을 하며 살았을까? 우리는 왜 기꺼이 소수자(minority)가 되려 하는가?
2007년에 완공된 헤르조그 드뮈홍(H&dM)의 첫 고급주거 프로젝트
40 Bond Street 프로젝트는 2004년 당시 떠오르는 신예건축가그룹이던 H&dM(헤르조그엔 드 뮈홍)은 뉴욕에 첫 프로젝트다. 건물은 소호(SoHo)로 알려진 구역의 북쪽 (NoHo)에 위치하고 고급주거와 상점이 있는 장소다.
가장 큰 특징은 느슨한 옷을 입혀놓은 듯한 껍데기 부분인데 자연스럽게 시선을 집중시키면서 사유지와 도로를 구분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도로에 면한 부분은 타운하우스로 고급 주거에 속한다. 건물의 윗부분은 아파트먼트로 일반적인 주거모델에 속한다. 지난번 뉴욕에 방문했을때 이 곳까지 들어올 일이 없어서 보지 못했었는데 이번엔 꼭 챙겨서 봤다. 일반인의 눈에는 그라피티처럼 보이는 저 껍질에 해당하는 부분이 흉물스럽게 보일 수 있다. 동시에, 이 껍데기가 건축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56 Leonard Street
10년뒤 헤르조그 드뮈홍이 비슷한 문제를 해결한 방법, 과연 어떻게 달라졌을까?
취미로 번역을 하던때에 "파사드에서 바닥판으로"라는 글을 번역한적이 있다. 위 두 작품의 건축가인 헤르조그 드 뮈홍의 작품을 분석한 글이다. 그들의 관심사가 어떻게 파사드(facade, 건축의 바깥면)에서 바닥면으로 이동하였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위 40 Bond Street 에서는 다른 초창기 작품과 마찬가지로 거리에 면한 건물의 얼굴에 신경을 많이 썼다. 10년이 지나서 56 Leonard Street 에서는 역시 파사드가 범상치 않은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파사드를 조직하는 논리는 내부 공간의 평면도가 결정했다. 예를들어 24평형, 35평형, 70평형 유닛을 서로 다르게 조직하고(더 효율적인 동선 혹은 더 멋있는 도시풍경을 향해 재배치하는 것등을 이미한다) 그것을 차례로 쌓다보면 마치 젠가를 쌓아올린 것 같은 현재의 형태가 만들어 지는 것이다.
40 Bond Street 에서 56 Leonard street 까지 약 20분 정도 걸었다. 그 20분동안 헤르조그의 작품세계는 10년이상 차이가 난다. 참 재밌는 경험이다.
건축의 표피(skin)에 신경쓰는 경향을 단순히 외모에 치중하는 자기중심적인(ego-centric)한 제스쳐라 볼수도 있겠지만, 건축에서 표피의 문제는 '사적인 공간'이 '외부공간(공공공간)'과 어떻게 마주하게 해야하는가 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고, 40 Bond Street 에서처럼 우리가 시각예술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건축과 어떻게 통합될 수 있으며 그것이 궁극적으로 우리 삶에 어떤 영향 (기능적/심미적 영향 모두)을 끼칠 수 있는지 탐구할 수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 모든 관점은 그대로 유지되어 56 Leonard Street 프로젝트에 반영되었다. 다만 그 방법이 다를뿐.
2000년 9월 11일 테러의 상흔이 거의 다 아물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래 보인다. 건물의 뼈대와 공학기술을 최대한으로 표현하는 건축가의 작품 Oculus를 다녀왔다.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 자리에 지어진 수천만을 위한 눈물(공공미술품)을 관람했었다. 그때까지만해도 아직 설계단계였는데 완공이 되었다길래 안에 들어가봤다.
테러가 있었던 곳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정도로 경쾌했다. 우리가 911테러를 기억하는 방식과는 분명히 다르다. 이 곳은 비극적인 장소가 있었던 장소인 것은 맞지만 동시에 전세계 경제의 중심지라 불리는 Wall street를 목전에 둔 장소이며, 많은 이들이 경제활동을 하는 곳이라는 점을 잊지 않은 듯 했다. 덕분에 다시한번 생각해봤다, 우리가 이미 떠나간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의 삶은 어떻게 지속되어야하는가? 쇼핑이라는 것이 때로는 저급한 욕망이 난무하는 격조없는 행동이라 생각한다면 이질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쌍둥이빌딩(World Trade Center)가 자본주의의 건재함을 보여주기 위해 건설되었었다는 것을 상기해보면 21세기, 아니 911 테러 이후의 뉴요커들이 꾸려나가야 했던 공간은 이게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Day 3 에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