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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파티쉐 May 14. 2020

내 정체성은 쇼콜라띠에

노점부터 시작한 초콜릿 가게 이야기

   좁은 일방통행로 건너편에 서서 한참동안 가게안팎을 바라보았다.  5월의 오후 햇살은 북향건물을 느리게 비추고 있었다.  1972년에 지어진 3층 건물의 외관은 군데군데 흰 페인트가 벗겨지고 그나마도 색이 바래어 누렇다.  워낙 낡아서 지리적으로 구시가지라는 점과 꽤 조화를 이룬다는 생각이 든다.  건물 1층의 바깥쪽은 그래서 진한 분홍색에 붉은 색이 섞인 페인트를 칠했다.  명색이 초콜릿가게라 건물과 상관없이 산뜻하게 보이고 싶었다.  문득 가게를 시작하기 된 계기가 떠올랐다.     


    2010년 가을, 허리를 다친 후 힘들게 준비한 유학을 포기하고 몇 가지의 파트타임 일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조금 모아둔 돈마저 지인의 사기로 날렸다.  도대체 뭘 해먹고 살아야 하나 막막하던 시기였다.

그 날은 친구 H의 제안으로 한 카페를 찾게 되었다. 작은 오솔길 양옆으로 들꽃이 피어있는 입구를 지나 가게문을 열었을 때 안에는 달콤쌉싸름한 냄새와 함께 흐느적거리는 재즈가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H의 권유로 4조각의 초콜릿과 흑맥주를 주문하고, 안쪽정원에 놓여진 빈티지한 테이블들을 보며 조금 따뜻한 날에는 저기에 앉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풍부한 거품을 자랑하는 기네스 한잔과 네모반듯하게 만들어진 ‘파베’가 민무늬 흰 접시에 담겨져 나왔다.  포크로 찍어서 한 조각을 입에 넣었을 때의 그 차가운 감촉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맛있다!  나는 마음 한켠이 흘러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초콜릿을 팔다니!? 그것도 한국에서!

   중학교 시절, 교과서에 나왔던 <위그든씨의 사탕가게>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던 나는 언젠가 사탕가게를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단 걸 팔았다가는 쫄딱 망할걸.  한국사람들은 단 걸 싫어하잖아’라며 쉽게 꿈을 접어버렸다.  그런데 누군가는 ‘단 것’을 팔고 있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부끄러웠다.  


   찾아보니 꽤 많은 초콜릿샵이 있었다.  호주 시드니에서 새벽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가던 길, 달콤한 향으로 뒤덮인 초콜릿가게를 지날때마다 한국에도 이런 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했던 일이 생각났다.  나는 그 길로 초콜릿 공방을 찾아갔다.  수중에 남은 돈을 탈탈 털어도 프랑스의 유명 학교까지 갈 학비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초콜릿 만드는 기술을 배우면서 주말에는 노점을 열었다.  어차피 만드는 초콜릿, 내가 다 먹을 수도 없는데 팔아서 생계라도 유지해야겠다 라는 생각이었다.  돌이켜보면 너무나 어설픈 시작이었다.  아는 언니가 피부관리실에서 쓰던 작은 카트를 빌리고, 엄마집에서 가져온 레이스 테이블보를 얹어, 초콜릿 상자를 대여섯 개 늘어놓았다.  아는 사람을 만날까 가슴이 콩당거렸다.  호객행위를 하는 일도 만만치가 않았다.  지나가던 사람이 관심이라도 보일라치면 대답하기도 전에 얼굴이 화닥가렸다.

   꽤 시간이 흘렀다.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냥 다 접고 들어갈까, 뭐가 문제일까, 내가 과연 이 일을 지속할 수 있을까.

   마침내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어린 여성이 한 조각을 사주어 겨우 개시를 했다.  헌데 그 손님이 몇 걸음 가다가 뒤돌아 오는 것이다. 무슨 일이지 걱정이 되었다.

맛있네요.  열 개 더 싸주세요.”

  값으론 이만 오천원이었다.  마지팬이라는, 한국인에게는 생소한 재료와 럼에 절인 다진 살구가 들어간 초콜릿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자신감이 조금 붙었다.  점점 뻔뻔하게 사람을 불러세우기도 하고, 테이블도 파라솔이 달린 것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행상이라는 건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주말을 앞두고 며칠의 밤샘 작업을 해놓고 토요일 아침에 비가 오면 울상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또 바람이 세차게 불어 파라솔과 테이블이 통째로 뒤집어지는 바람에 빗물이 고인 길바닥으로 초콜릿이 나뒹굴기도 했다.  여름엔 기온이 높아 도저히 초콜릿을 만들 수도 팔 수도 없어 대신 음료수를 만들어 팔았다.  공무원의 단속에 걸려 짐을 쌌다 폈다를 반복했다.


  도저히 노점으로는 충분한 수입을 얻을 수 없었다.  나는 노점을 했던 근처에 작은 공방을 열고 수업을 시작했다.  그래도 쇼콜라띠에라는 직업이 워낙 희소성이 있었기에 여러 중학교에서 체험수업 의뢰가 들어왔다.  어줍잖은 실력이지만 전문가반도 개설했다.  노점을 하며 얼굴을 익힌 손님들이 공방으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판매는 했지만 사실 그 공방은 근린시설이 아니었다.  3평 남짓한 한옥의 셋방이라 작업대를 놓고나니 쇼케이스를 둘 공간도 없었다.  저렴했지만, 비좁고 쾌적하지 못했다.  돈을 아끼자고 직접 바른 연보라빛 벽지는 날이 갈수록 울퉁불퉁한 벽을 더 도드라지게 했다.  간판을 걸 수가 없어 배너를 세워두면 어느새 공무원들이 불법철거물이라며 걷어가 버렸다.  안되겠다.  가게에서 정식으로 시작해보자.     

  

   지금은 정부에서 지원하는 청년창업시스템이 정말 잘 되어있지만 그 당시에는 저리로 창업대출을 받는 일만 해도 경쟁이 치열했다.  공방에서 근근히 버텨나가던 상황이었기에 모든 자본을 대출에 의지해야 했다.  중소기업진흥공단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에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넣고 합격해, 한 주의 연수를 갔다.  프레젠테이션까지 마치고 최종참가자 20명중 합격자 9명안에 들어서 창업자금을 대출받을 수 있었다.  사업계획서도, 프레젠테이션도 태어나 처음 해보는 일들이라 얼떨떨했지만 궁하면 통한다던 말이 있잖은가.  고맙게도 많은 이에게 도움을 받았다.

    초콜릿카페 창업을 하고, 몇 개의 지원사업에 선정되었다.  카달로그도 만들고, 돈 때문에 엄두도 못냈던 포장박스도 생겼다.  맨바닥 헤딩인생이었는데 생전처음 뒷배가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가끔 손님들이 가맹점이냐며 물어올 때 프랜차이즈를 할 계획입니다라며 웃었다.  운이 좋게 스위스의 초콜릿공장에 연수도 가게 되었다.  브랜드 가치를 높이려고 대회에 출전해서 상도 받고, 디저트도 배우러 다녔다.  가게는 내가 성장하는 만큼 더불어 좋아지고 있었다.  방송 출연도 여러 번 했고, 현재도 라디오 한 코너는 진행중이다.     

  

   영업실적이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할 때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다.  두세달을 겨우 버텨냈다.  몇 개월간 메르스가 전국을 공포에 떨게 했던 때도 가게가 휘청거렸다.  직원의 고용유지와 버려지는 식재료비, 임대료를 내기 위해 추가 대출을 받았다.  (이런 일들로 인해 코로나19 위기로 소상공인들이 얼마나 힘들지 깊이 공감된다.)

   잘해내고 싶었다.  기술개발을 하느라 늘 분주하고 바빴다.  일요일도 쉬지 않고 문을 열었고,  앉아있어 본 기억이 없다.  발렌타인데이 시즌에는 일이 밀려 잠을 거의 잘 수 없었다.

   무리해서 일했던 지난 십 년은 그러나 그 앞의 35년간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내게 가르쳐주었다.  소소한 기쁨들도 많았다.  우리 공방에서 케이크를 직접 만들어 프로포즈를 한 커플도 있고, 반려견이 무지개다리를 건너서 시름에 빠졌을 때 내 마카롱으로 위안이 되었다고 해주신 여자분도 계시다.  여자친구에게 고백할 때 초콜릿덕분에 잘 되었다고 말씀해주신 남자손님도 있었다.  이제 ‘찰리표 핫초콜릿’을 못 먹게되어 너무 슬프다는 분들께는 죄송한 마음도 든다.     

  

   가게안에서 새 주인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그는 이십대 후반의 호리호리한 젊은 청년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올 것 같은 고운 인상이다.  그가 나보다 잘해나가길 진심으로 빌었다.  오랫동안 건강을 못 챙긴 자신에게 미안해서 이제라도 잠시 멈춰야했지만, 쇼콜라띠에로 살았던 시간은 내 인생의 큰 용기가 되어줄 것이다.  이제 나는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 살게 되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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